브라이언 싱어는 ‘슈퍼맨 리턴즈’(2006)의 말미에서 ‘어째서 세상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는가?’란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고심하는 로이스 레인의 표정을 잠시 비춘 바 있다. 이는 슈퍼맨을 다루는 창작자라면 다들 직면했을 법한 난제이다.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1978)이 장르의 비조(鼻祖)이긴 하지만, 크립토나이트를 제외하면 약점이 없다시피 한데다 인간성에 있어서도 흠잡을 데 없는 완전무결한 영웅상, 이상적인 만큼이나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슈퍼맨의 캐릭터성은 현실감과 입체성을 요구하게 된 현대 관객의 눈에 맞춰 각색하기엔 참으로 난감한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건의 ‘슈퍼맨’(2025)은 그 질문에 대한 우리 시대의 적절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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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슈퍼맨’의 한 장면. |
영화는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의 패배로 막을 연다. 북극의 빙하에 처박히는 추락의 하강동선은 미국적 이상주의의 퇴조와 몰락에 대한 암시로 작용한다. 탄생과 성장 과정을 다루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급작스러움이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인물과 서사에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 제임스 건의 비범함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자 속도감 있는 진행을 보여주지만, 돌이켜 곱씹어보면 신기할 정도로 필요한 이야기의 면면들, 감정과 디테일을 두 시간 남짓에 다 챙겨내는, 정교함과 효율성을 겸비한 스토리텔링의 활공에 있다. 설명이 부족해 보이나 압축과 생략의 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 겉핥기는 아닌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브가 연기하던 시절의 슈퍼맨은 ‘진실과 정의, 그리고 미국인의 길’을 지키기 위해 활약한다고 호언했었다. 그러나 슈퍼맨이 대표하던 미국의 자유와 관용이 무너졌다면 어떻게 되는가?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의 진정한 동기는 슈퍼맨의 숨통을 끓는 것인데, 지구는 순수한 인간만의 세계여야만 하기에 ‘외계인’(alien)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는 크립톤 행성에서 지구로 온 슈퍼맨의 처지처럼 이민자의 국가라는 미국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다를 바 없다. 그의 수하로 폭력의 대행자인 울트라맨 또한 실상이 유전공학으로 만들어낸 슈퍼맨의 복제임이 밝혀지면서 루터와 마찬가지로 변질되고 타락한 미국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정반대로 뒤집힌 거울상이 된다.
외계인뿐만 아니라 거슬리는 다른 존재를 사설 감옥에 가두는 루터는 영락없는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을, 보라비아의 자한푸르 침공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분쟁을 환기시킨다. 오늘날 관객이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게 된 건, 단지 구태의연한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 반복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달라진 시대상에 따라 영웅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부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제임스 건은 만화의 프레임 속에 디스토피아가 된 현실의 풍경 일부를 끌어들이고는, 그 한 가운데에 슈퍼맨을 던져놓는다. 그는 우리가 냉소와 비관, 혐오의 시대에 처해있고, 그렇기에 상실되고 실추된 이상주의, 고결함의 표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본 듯하다. 메시아는 아니지만 때론 격정에 휩쓸리곤 하는 서툴고 감정적인 청년, 그저 옳은 일을 하고 싶을 뿐인 한 ‘사람’(man)으로서의 슈퍼맨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싶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