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굴황제 제압 뒤 새 정부 세워
- 런던의 회의실서 한 국가 통치
- 규제받지 않는 초국적 기업들
- 권력 오남용에 대한 경고 던져

“우리는 지금도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그 표현은 더 음험한 현실을 가린다. 18세기 중반에 인도의 커다란 땅덩어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장본인은 영국 정부가 아니었다. (중략) 인도에서 식민주의로의 이행은 오로지 투자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한 영리 기업 치하에서 일어났다.” 학창 시절 세계사에서 배운 바로 그 ‘동인도회사’다. 윌리엄 달림플의 ‘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은 영(英)제국보다 먼저 제국이 된 기업, 동인도회사의 탐욕이 낳은 혼돈의 역사를 해부한다.

1808년 윌리엄 대니얼이 그린 ‘동인도회사 부두 풍경’. 생각의힘 제공

저자는 영국과 인도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온 역사가다. 런던 영국도서관 문서고와 뉴델리 인도 국립문서고에 보관되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천수만 장에 달하는 회사의 방대한 기록. 무굴 제국의 역사가, 귀족, 서기들이 18세기에 걸쳐 내놓은 페르시아어 역사서.

저자는 많은 자료를 활용해 학문적 엄밀성과 문학적 흡인력을 동시에 갖춘 정밀한 서사를 구축했다. 인도와 영국의 비극적 만남을 넘어, 오늘날 날이 갈수록 막강해지는 빅테크의 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성찰하게 한다.

책 내용의 요약이다. “1765년 8월, 영국 동인도회사는 젊은 무굴 황제를 제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운영하는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사병을 동원해 세금을 징수했다. 이 새로운 정부의 수립은 동인도회사가 더는 일반적인 기업이 아님을 의미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동인도회사는 전례 없는 존재, 즉 공격적인 식민 권력으로 변모한 국제 기업이 되었다. 이후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런던 시내의 한 이사회 회의실에서 통치했다.”

무굴 제국은 세계 무역과 제조업을 지배하고,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4배가 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나라였다. 저자는 동인도회사의 침략뿐만이 아니라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과 종교적 분열, 황제와 지방 토후들의 끊임없는 내전을 현장감 넘치게 그려낸다. 이런 혼란은 동인도회사라는 불씨가 거대한 제국을 불태울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저자는 무굴 제국이라는 비극적인 거울을 통해 외부의 힘으로 무력해진 국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에 ‘동인도 회사 부두 풍경’ 그림과 설명이 있다. “1750년대에서 불과 50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한때 무굴 인도였던 것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고 전 지구를 에워쌌다. 또한 정교한 행정과 공무원 조직을 만들어내고, 런던 항만 구역의 상당 부분을 건설했으며, 영국 무역의 거의 절반을 담당하게 됐다. 회사의 연간 지출은 영국 내에서만 대략 850만 파운드로 영국 정부의 연간 총지출의 대략 4분의 1과 맞먹었다. 회사가 이제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원대한 상인회’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했다.”

저자는 오늘날 또 다른 형태의 기업 제국이 있음을 깨우쳐준다. 빅테크와 AI 기업들은 거대 자본, 막대한 양의 데이터, 자연 자원을 소비하며 웬만한 나라의 GDP를 넘어서는 수준의 가치를 과시한다. 이 거대 기업들은 충분히 규제받지 않으며, 책임 역시 제한적이다. 규제받지 않는 기업 권력의 끝은 어디인가. 폭주하는 빅테크와 AI시대에 섬뜩한 교훈을 던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