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 사각지대 비판적 시각 담아
- ‘공간 힘’ 11월 16일까지 기획전

부산 수영구 팔도시장 인근 골목길에 있는 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생소한 숫자 조합이 펼쳐진다. ‘00:00’.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색칠하다 만 것 같은 숫자들이 나열된 액자, 그리고 정각을 가리키는 다양한 시계 사진까지. 조수민 작가의 ‘온타임’과 ‘정각을 놓친 순간들’은 매번 주어진 시간 안에 숫자를 색칠하는 노동과 바깥에서 포착한 시간을 통해 노동자로 여겨지지 않는, ‘노동자로서 예술가’를 조명한 작품이다.

공간 힘(부산 수영구 수영동)에서 열린 기획전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이 가능한가’ 전시장 모습. 주용성 촬영, 공간 힘 제공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어두운 공간에 박금비 작가의 ‘맛있는 도넛 만드는 법’과 파과주의 인터내셔널의 ‘구멍, 화물 절도 연대기’ 두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박금비 작가는 다양한 직군을 경험하며 발견한 노동의 구멍, 즉 노동이지만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짚어내며 노동시장의 구멍을 발견한다.

파과주의 인터내셔널이 주목한 구멍은 더 드라마틱하다. 국내에 처음 작품을 소개한 이들은 소년원에서 일하는 이의 블로그를 모티브로 삼아 화물 절도 사건을 목격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절도 사건으로 판매되지 못한 유예된 상품, 즉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구멍을 통해 물류 노동의 구조가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 환기시켜준다.

시각예술 전시공간 ‘공간 힘(부산 수영구 수미로50번가길 3)’이 마련한 기획전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는 이처럼 노동시장에서 발생한 구멍을 조명한 작품을 통해 현대사회의 노동, 노동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14년 문을 연 공간 힘은 사회문화를 예술로 사유하고 발화하는 것을 목표로 기획자와 작가로 구성된 운영진이 전시·세미나·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치는 곳이다. 골목길에 있는 평범한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다루는 주제와 작품은 사회 이슈와 그것을 조명한 예술을 소개해 비범하다.

전시 제목은 2019년 마트산업노동조합의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달라’는 요구에서 출발했다. 물류 산업 전반의 노동 현실과 나아가 노동시장에서 존재하는 사각지대, 즉 구멍에 관해 다루며 노동에 대한 생각과 가치,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냈다.

특히 이번 기획전은 공간 힘으로서는 새로운 변곡점이라고 일컬을 만큼 공들여 마련했다. 각자의 주제를 연구한 3명의 기획자 강주영 김선영 진세영이 올해 처음으로 공동 기획전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공간 힘이 보여줄 새로운 시도가 기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전시는 다음 달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