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2025)은 모종의 미스터리를 안은 채 출발한다. 여고생 주인(서수빈)의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결손가정이라는 점 외에는 대체로 평온해 보인다. 그리고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사소한 일상에 조금씩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게 하는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밝고 명랑해보였던 소녀의 웃음이 실은 벼랑 끝에 더 내몰리지 않고자 하는 필사의 몸짓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나면서부터 막을 바꾼 영화는 전혀 다른 정조(情操)와 국면을 향해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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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
아이들 간의 관계에 밀착해 미세한 감정의 결을 파고들었던 ‘우리들’(2016)의 사소설적 프레임은 아이들 간의 문제는 풀리지만 강제퇴거와 같은 어른들의 현실은 해결되지 않아 희비와 명암이 교차했던 ‘우리집’(2019)을 거치면서 외연을 넓혀 ‘세계의 주인’에 이른다. 주인공의 연령대가 청소년으로 올라가 당사자성을 띠게 된 이 영화에서 윤가은은 마침내 개인이 처한 일상의 작은 영역으로부터 세상 전체의 균열을 환기해 내고, 그로서 총체적인 조망의 지점에 이르고자 했던 대만 뉴웨이브의 한 이상에 온전히 도달한 듯하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 속에 감춰진, 상징과 은유라는 이름의 빵부스러기를 따라가며 관객은 감독이 안배해 둔 논리의 회로 속을 걸어가게 된다. 마술사를 꿈꾸는 주인의 동생 해인은 나중에 학예회에서 사람들의 걱정과 고민을 적은 쪽지들을 상자 안에 넣고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시도하다 실패한다. 주인이 성폭행 사건을 겪었을 때 부모가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때도 가족의 자리는 부재(不在)하고, 감추는 데 실패해 바닥에 버려진 쪽지들은 버려진 쓰레기가 방치된 하천의 풍경과 몽타주로 이어지며 그 의미를 중층적으로 강화한다. 강물의 흐름처럼 삶의 시간 또한 흘러가지만 치워지지 않은 쪽지와 과자 부스러기, 침대 매트리스 밑에 감춰둔 편지, 쓰레기봉투, 그리고 태권도 도장의 벽에 남은 흔적처럼, 청산되지 못한 상처는 평생을 구속하는 짐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떳떳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억압당한 개인의 정체성은 이중으로 분열한다. 주인이 세차 중인 차 안에서 그동안 억눌러온 심정을 불처럼 토해내는 순간은 대담한 시청각적 상상력이 발휘된 명장면이 아닐 수 없는데, 피해자의 솔직한 발화(發話)가 세상 바깥의 광장이 아닌 그들만의 밀실에서야 가능하며, 그마저도 소음에 의해 파묻히고 만다는 이 무언의 속삭임에서 비극성은 절정에 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는 걸 잊지 않는다. 주인과 도장 선배인 미도(고민시)의 당찬 행동거지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애써 정상적인 모습을 연기해야 피해자 행세라는 세간의 모욕과 비난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선 전망이 암울하고 비관적이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견뎌내고 이겨낼 힘과 웃음을 나눌 동료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는 궁극적인 낙관이자 긍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세상의 상처 입은 자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교만한 연민(Sympathy)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고 상냥히 말을 건넬 줄 아는 공감(empathy)의 미덕이라는 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