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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고 신화를 쓴 불세출 작가…그를 찾아가는 여정도 ‘서사’

한국문학관 기행 <2> 이병주문학관

  • 김종회 문학평론가·한국문학관협회 회장
  •  |   입력 : 2026-04-26 19:42:56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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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을 찾은 필자 김종회(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국문학관협회 회장이 동행한 영산대 인문문화 융합학과 학생들과 함께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 나림이 태어난 삼포지향 하동
- 지리산 자락 소박한 기념공간

- 역사 뒤 숨은 진실·가치 좇던
- 열혈작가 정신·작품세계 엿봐

- 좌우 사상 망라했던 거대담론
- 그의 문학 재평가하는 날 오길

이달 초순, 이병주문학관이 있는 경남 하동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벚꽃 만개였다. 이 길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정서가 천천히 겹쳐지는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지는 여정이었다.

■이병주문학관 가는 길목

이병주 선생
하동이 20세기 한국 문학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병주의 고향이자, 박경리 ‘토지’의 배경 지역이기에 더욱 그렇다.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이 이곳 태생이고, 관내 화개장터에는 김동리의 ‘역마’ 무대임을 말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하동군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수합하여, 일찍이 2019년 10월 하동을 ‘문학수도’라고 선언했다.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유려한 물길,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들판과 차밭, 특히 지리산 자락이 만들어내는 깊은 원경 등이 ‘슬로시티’ 하동의 매혹이다.

이번 기행에는 영산대학교 인문문화 융합학과 학생들이 함께했다. 남녘의 순후한 자연 풍광과 잘 어울리게 지어진 문학관은 독립된 한 채 건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전시실 강당 사무실 등 소박한 구조로 되어 있으나 그래도 작가와 작품을 보여주는 효율적인 조합을 이루었다.

정문 입구에 작은 오벨리스크처럼 서 있는 두 개의 펜은, 한 시대를 종횡한 작가의 필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문학관의 마당과 작은 나무들은 봄 햇볕 아래 고즈넉하고 청신하다. 예부터 하동을 두고 지리산과 다도해와 섬진강이 함께 만나는 고장이라 하여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불렀다. 그 하동의 섬진강 변에 자연석으로 된 문학비 하나가 서 있고,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소설가 나림 이병주 선생의 문학비다. 이 선언적이며 고색창연해 보이는 비문의 수사(修辭)는 선생의 문학관, 소설관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이 한 줄의 문장은 널리 알려진 선생의 소설 ‘산하’ 첫 장에 기록된 에피그램(epigram·경구)이다. 실제적 삶의 집적인 ‘역사’에 비추어 그 배면에 잠복한 숨은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문학’의 존재 양식, 그렇게 존재하는 문학의 지위에 대한 인식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

■작가 이병주에 대한 기억

김 회장이 영산대 학생들에게 이병주 작가에 관해 강연하는 모습.
선생이 타계하기 수년 전, 그러니까 필자가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던 1980년대 말의 일이다. 어느 오후 선생께서 늘 나와 계시던 K호텔 커피숍에서, 필자는 매우 무모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선생님, 역사란 무엇입니까?”

역사가 무엇이냐라니! 도대체 이따위 대책 없는 선문답 류의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학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특히 역사소설의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끌어안고 선생을 만난 필자로서는 꼭 내놓아야 할 질문이었다. 선생의 답변은 의외로 짧았고, 역시 선문답적인 것이었다.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일세.”

아니, 역사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니! 당시는 ‘운동개념으로서의 문학’이 한 시대를 풍미하여 민족 조국 역사 등의 언사가 그 이름만으로도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어조는 단호하고 명쾌했으며, 필자는 거기에 감히 추가의 질문을 덧붙이지 못했다.

선생이 유명(幽明)을 달리한 해가 1992년이니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지금, 그 말씀은 아직 필자의 귓전에 힘 있게 살아있다. 그간의 지속적인 문학 공부를 통해 왜 선생이 그렇게 말했고,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가를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에게 있어 기록된 사실로서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실체를 정면에서 파악하는 데 그칠 뿐, 그 정론성의 성긴 그물망으로는 포획할 수 없는 삶의 가치와 진실에 대해서는 무방비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탄생 105주년 불세출의 작가

문학관 내 전시실.
이병주 선생의 탄생이 1921년이니 올해로 105주년이다. 그의 타계는 1992년으로 올해 34주기다. 대학의 국문학과에서 30년간 문학을 강의하고 문단에서 문학평론가로 40년 가까이 비평문을 써 온 필자의 견식으로, 선생을 일러 ‘불세출의 작가”라 호명하는 것이 그다지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남긴 80여 권 분량의 소설과 에세이들에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실록의 서사와 춘추필법을 구사하는 문면(文面)을 정독해 보면 이를 쉽사리 납득할 수 있다.

일찍이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고 써 붙여 두었던 터이니, 기량에 있어서나 의욕에 있어서나 천생의 작가였던 셈이다.

대표적인 이병주 연구자였던 고(故) 김윤식 선생으로부터 필자가 직접 들은 회고담이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이병주 장편소설 ‘비창’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사고와 행위가 너무 질정(質定)이 없지 않느냐.” 그랬더니 나림 선생의 대답이 이랬다는 것이다. “나는 육십이 넘은 지금도 세상살이에 갈팡질팡하는데, 이제 삼십 넘은 술집 마담의 형편에 질정 없이 행동하는 것이 이상할 바 있겠느냐.”

김윤식 선생은 그 ‘우문현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김 선생이 말년에 토로한 바로는, 한국의 작가 가운데 사람으로나 작품으로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이병주라고 했다.

이병주 소설은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유장(悠長)하게 풀어나가는 데 특장이 있다. 일찍이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을 읽고 그 마력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 것은 그런 점에서 사뭇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들은 확고하게 ‘읽기의 재미’를 공여한다. 미상불 이는 소설 형식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병주의 책을 서재에 두면 귀가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는 수사(修辭)나, ‘이병주가 집에서 기다린다’는 비유적 표현은 이를 잘 말해준다.

동시에 그의 소설들은 인생사에 대한 교훈과 경륜을 습득하게 한다. 현란한 현대사회의 물질문명 앞에 위축된 우리 시대의 갑남을녀(甲男乙女)들에게, 거대담론의 기개를 회복하고 굳어버린 인식의 벽을 부수는 상상력의 힘을 북돋우게 한다.

■말 없는 산하 쓸쓸한 감회

이병주기념사업회 발족 이후 역사성의 소설을 모은 선집 30권이 발간된 것은 2006년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21년,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중 성향의 ‘재미있는’ 선집 12권이 새로 묶여 나왔다. 한국문학에서 문·사·철의 고급한 교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가, 사상에 있어 좌·우익을 망라하여 문학을 통한 정치토론을 유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가 이병주다. 그런 연유로 그 기념사업회에는 좌·우 이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함께 망라되어 있다.

이제 한국 문단은 그에 대해 대체로 인색했던 평가와 비교적 미흡했던 연구의 구각(舊殼)을 탈피해야 한다. 아름다운 고장 하동의 삼포지향을 기리듯, 하동이 낳은 걸출한 작가 나림 이병주를 다시 돌아볼 때다. 탄생 105년, 한 세기의 무게가 거기에 실려있는 까닭에서다.

한국문학관 기행의 두 번째 순서로 이병주문학관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한편으로는 보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좀 쓸쓸했다. 필자 또한 선생의 문학 그리고 문학관과 더불어 20년 세월을 보낸 터이기에 그 감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작가는 죽어서 작품을 남기고 작품으로 죽음을 넘는다고 하는데, 선생이 가고 없는 이 산하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한 시대의 에포크를 그은 작가도 그의 수발(秀拔)한 작품들도, 결국은 수용자인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그 값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시대적 삶의 갈피 속에서 열혈의 작가정신으로 살다간 그의 세계를 엿보는 일은, 그래서 우리 인생의 비의(秘義) 한 자락을 목도하는 값있는 체험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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