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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명태 풍어 전경이 담긴 사진엽서.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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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국민 생선’ 하면 고등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즐겨 먹던 대표적인 ‘국민 생선’은 명태였다.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명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북어(北魚)는 우리나라 덕원(德原) 원산도(元山島)에서 난다. 명천(明川) 지방에서는 옛날에 잡히지 않았다. 명천의 ‘태(太)’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낚시를 하다가 처음으로 북어를 잡았는데 크고 살찌고 맛이 좋은 까닭에 명태(明太)라고 이름 붙였다. … (중략)… 대개 물고기 중에서 많은 것에 속해 비록 깊은 산골의 궁벽한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먹지 않는 곳이 없다.”
당시 명태가 누렸던 국민 생선으로서의 위상은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의 저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명태를 말린 건어물은 전국에 두루 유통되며 한 마리의 가격이 몇 문(文)이나 한다. 그 값은 어느 지방이나 다 같고 일상적으로 사랑받는 반찬으로 쓰이며, 여항의 평민은 이것으로 포를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고 빈한한 가계의 유생 또한 제물로 올릴 수 있으니, 흔한 것이면서 귀하게 쓰인다.…(후략)”
이처럼 명태는 조선 후기인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된 명태는 일상의 식탁부터 제례용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생선이었다.
명태는 수요가 컸던 만큼 명칭도 다양했다. 건조 및 가공 상태, 크기, 어획 시기 등에 따라 생태 동태 북어 춘태 노가리 등으로 세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장부터 알까지 버릴 것이 없어 찌개 국 찜 구이 젓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되었다.
구즈 슈스케(葛生修吉)의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을 통해 1900년대 초반 명태 어업 상황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명태 어업이 한국에서 가장 큰 어업이고 명태의 어획량이 가장 많은 곳은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과 이원군(利原郡) 사이의 연안에 위치한 신포(新浦), 신창(新昌), 차포(遮浦) 마을”이라고 했다.
이처럼 동해안의 대표 어종이자 풍어의 상징이었던 명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수온 상승과 무분별한 어획으로 인해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1968년부터 2025년까지 58년간 우리나라 주변 해역 표층 수온은 1.6도 상승했다.
특히 동해 표층 수온은 55년간 세계 평균보다 3.5배나 높게 상승해 어자원이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 결과 국내 소비 명태의 대부분을 러시아산에 의존하게 되면서 명태는 수입 수산물 1위 품목이 되었다. 한때 국민 생선이었던 명태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 바다의 대표 생선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8일은 유엔 총회가 바다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지정한 ‘세계 해양의 날’이었다.
우리 바다의 명태를 다시 식탁에서 만나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해양 생태계 회복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