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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 이스탄불 도심에 있는 ‘휘렘 술탄 하맘’ 내부 모습. 1556년 지어져 동네 대중목욕탕 ‘하맘’으로 사랑받던 공간이 오랜 역사를 거쳐 지금은 고급 목욕탕으로 변신해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김태훈 기자 |
- 보일러 보급되며 급격한 사양길
- 2000년대 들어 관광 자원 복원
- 세신사 때수건 밀고 거품마사지
- 이스탄불 찾는 외국인 필수코스
- 수십 만원 관광상품 위주로 변질
- 영세한 동네 하맘 보호 목소리도
거대한 돔 천장 아래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리석 공간이 목욕객을 맞이한다. 벽면 장식 하나하나에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져 목욕탕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적인 건축물처럼 느껴진다. 지난달 7일 찾은 튀르키예 전통 목욕탕 ‘하맘’이다.
한 가운데 놓인 널찍한 대리석 돌판 위에 젊은 남성 서너 명이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돌판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열기에 몸을 맡긴 채 기다리다 보면 튀르키예식 세신 서비스가 시작된다. 세신사가 들어와 손님의 몸에 물을 끼얹고 튀르키예식 때수건 ‘케세’로 부드럽게 때를 밀기 시작했다. 한 차례 세신이 끝나면 거품 마사지가 이어진다. 세신사의 손길이 어깨와 등, 팔과 다리를 따라 꼼꼼히 이어질 때마다 손님의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목욕을 마친 뒤 로비로 나오면, 달콤한 ‘로쿰’(젤리 모양의 튀르키예 전통 간식)과 시원한 ‘셰르베트’(과일 허브 설탕 등을 섞은 튀르키예 전통 음료)가 목욕객을 반긴다. 독일에서 왔다는 한 목욕객은 하맘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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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 문화공간이 더해진 튀르키예 ‘제이렉 치닐리 하맘’의 갤러리. 김태훈 기자 |
■이스탄불 필수 관광 코스튀르키예의 전통 목욕탕 ‘하맘’은 따뜻한 대리석 돌판 ‘괴벡타시’(튀르키예어로 ‘배꼽 돌’이라는 뜻)에 누워 때를 불린 뒤 세신과 거품 마사지 등을 받는 공간이다. 최대 관광 도시 이스탄불을 찾는 외국인에게 하맘은 한 번쯤 경험해야 할 필수 코스로 꼽힌다. 이국적인 오스만 제국풍 공간에서 세신과 마사지를 받고, 고급 디저트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휴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2011년 문을 연 ‘휘렘 술탄 하맘’(이스탄불 파티흐)이다. 이곳은 이스탄불 관광의 핵심인 아야 소피아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용료는 코스에 따라 110유로(한화 20만 원 상당)부터 300유로(한화 50만 원 상당)에 이른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관광객이 몰리는 휴가철에는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다.
2024년 5월 개관한 ‘제이렉 치닐리 하맘’(이스탄불 파티흐)도 최근 관광객 사이 입소문을 탄 명소다. 이곳은 목욕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하맘 일부 공간을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하맘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전시물과 복원 공사 중 발굴된 유물까지 풍성한 볼거리가 마련돼 있다. 지하 1층 옛 저수조는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쓰인다.
하맘이 고품격 웰니스 문화로 재해석되면서 현지인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 튀르키예 젊은 여성 사이에서는 결혼을 앞두고 하맘을 통째로 빌려 ‘헤나 나이트’를 여는 것이 유행이다. 헤나 나이트는 결혼을 앞둔 신부를 위해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축복을 전하는 튀르키예 전통 행사다. 그동안 헤나 나이트는 주로 신부의 집이나 연회장에서 열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하맘이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공간으로 주목받으면서 이곳을 통째로 빌려 행사를 여는 사례가 늘고 있다. 행사 방식도 딱딱한 전통 의례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디저트와 차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형태로 바뀌었다.
■한국과 닮은 튀르키예 목욕사 |
| 튀르키예 이스탄불 구도심에 자리한 ‘호르호르 하맘’. 옛 동네 목욕탕의 모습을 간직한 남성 전용 하맘이다. 김태훈 기자 |
지금은 고급 웰니스 시설로 ‘환골탈태’했지만, 하맘은 본래 한국의 대중목욕탕처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공간이었다. 주말이면 주민은 하맘에 모여 몸을 씻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이스탄불 베이올루에서 2대째 아아 하맘을 운영 중인 휘세인 이을마즈(47) 대표는 “불과 40년 전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하맘에 들러 몸을 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며 “당시에는 외국인 목욕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1900년대 중후반에 들어 하맘은 쇠퇴기를 겪기 시작했다. 집마다 현대식 보일러와 욕실이 생기며 굳이 하맘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목욕 문화가 사양길에 접어든 과정이 ‘형제의 나라’ 한국의 대중목욕탕과 매우 닮았다.
하지만 이후의 흐름은 한국과 달랐다. 2000년대 들어 튀르키예 정부는 하맘을 낡은 목욕 시설이 아닌 되살려야 할 문화유산이자 관광 자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하맘을 복원하고 이를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사실 휘렘 술탄 하맘도 재개관하기 전까지 100년 가까이 방치됐던 공간이었다. 1556년 지어진 이곳은 1910년까지 약 400년 동안 주인이 바뀌며 하맘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1910년 문을 닫은 뒤에는 죄수 수용소, 카펫 전시관 등으로 쓰이며 본래 기능을 잃었다. 2007년 튀르키예 정부는 민간 기업에 장기 운영권을 임대하되 복원을 맡기는 방식으로 휘렘 술탄 하맘 재생에 나섰다. 이후 3년에 걸친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2011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휘렘 술탄 하맘이 민관 협력을 통해 되살아난 사례라면, 제이렉 치닐리 하맘은 민간 기업이 하맘의 흥행 가능성을 엿보고 직접 복원에 나선 사례다. 1500년대 지어진 이곳은 500년 가까이 하맘으로 운영되다가 2000년대 들어 문을 닫았다. 이후 10년간 방치된 공간을 튀르키예의 부동산·호텔 기업인 마르마라 그룹이 2010년 매입했고, 13년에 걸친 복원 작업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시민에게 돌아왔다.
이스탄불 하맘 조합 타흐신 칼욘(58) 회장은 “2010년대 이후 옛 하맘을 수리해 고급 서비스 공간으로 다시 여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며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관광 자원으로서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맘 부활을 향한 엇갈린 시선하지만 하맘의 ‘화려한 부활’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되살리고 전통 목욕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지만, 일각에서는 하맘이 과도한 관광 상품화 속에 ‘이국적인 체험 상품’으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와 함께 과거 동네 주민이 드나들던 생활 공간이 1회 목욕료만 수십만 원에 이르는 고급 웰니스 시설로 바뀌면서 주요 이용층이었던 서민의 접근이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 이스탄불 도심의 하맘은 방문객 대부분이 외국인 관광객이다. 휘렘 술탄 하맘 관계자는 “방문객의 90% 이상이 외국인”이라며 “10% 정도를 차지하는 현지인도 특별한 날 기분을 내거나 헤나 나이트를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반면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스탄불 구도심 악사라이역 인근의 ‘호르호르 하맘’(이스탄불 파티흐)은 4대째 운영 중인 남성 전용 하맘이다. 지난달 10일, 다른 하맘이라면 손님이 가장 많을 주말 오후 시간대에 이곳을 찾았지만 안에는 나이 지긋한 현지인 목욕객 서너 명이 전부였다. 이곳의 목욕료는 코스에 따라 3~17유로(한화 약 5000원~3만 원). 관광지의 하맘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최근에는 괴벡타시와 물을 따뜻하게 데우는 데 드는 난방비가 오르며 손님을 받아도 오히려 손해인 상황이 됐다. 호르호르 하맘의 휘세인 쿠르트(38) 대표는 “여전히 하맘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가족 대대로 지켜온 시설이기 때문에 간신히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동서대 권장욱 관광·컨벤션경영학과 교수는 “목욕 시설은 단순한 상업시설이 아니라 주민이 함께 이용해 온 생활 인프라의 성격도 지닌다”며 “목욕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본과 아이디어가 들어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되, 영세 업체와 주민을 보호할 제도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