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 현장엔 국화·쪽지 글
- 부산서도 피해자 애도 물결
- 동아대선 추모 게시판 설치
- "성추행·차별 대부분 경험"
- 여성, 사회의식 부족 비판
- 일부는 "남성 범죄자 취급"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건물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된 여성에 대한 추모 물결이 확산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여성혐오' 현상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혐오 범죄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일각에서는 정신질환자의 살인을 일반화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반발도 있다.
| |  |
| 20일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인근에 세워진 하트 모양 조형물에 '서울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 피해 여성의 죽음을 애도하는 쪽지 글과 꽃다발들이 빼곡히 놓여 있다. 서순용 선임기자 seosy@kookje.co.kr |
■추모 물결 전국으로 확산
사건은 지난 17일 새벽 1시5분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3층 건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벌어졌다. 이 건물 1층 주점에서 남자친구 등과 술을 마시던 A(여·23) 씨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김모(34) 씨가 휘두른 흉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는 인근 식당 종업원으로 주방에서 흉기를 훔쳐 이 건물로 들어와 1시간30분가량 숨어있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같은 날 오전 10시 경찰에 붙잡힌 김 씨는 "여자들이 나를 항상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피해 여성에 대한 추모 물결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18일 오전 개설된 트위터 계정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에 '강남역 10번 출구 국화꽃 한 송이와 쪽지 한 장. 이젠 여성폭력, 살해에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라는 글이 올라오며 시작된 추모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사건 현장 근처인 강남역 10번 출구 벽면에는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쪽지가 빼곡하게 붙었고 흰 국화 다발이 쌓였다. 대학가에는 대자보가 붙고, 온라인에는 자신의 여성 혐오 피해담을 공유하는 글도 수없이 올라왔다. '살아남았다' '묻지 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 혐오 살인'이라는 문구가 대거 등장했다.
부산에서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부터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인근 하트 모양 조형물은 피해 여성의 죽음을 애도하는 쪽지글로 뒤덮였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내용과 함께 '여성의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 살아 슬프다'는 등의 메시지가 남았다.
동아대 인문학회 카르마도 19일 오후 인문대 앞에 추모 게시판을 마련했다. 남성 학회장과 회원이 학회에 추모 게시판 설치를 제안했다. 이대희(24·철학과) 씨는 "평소 우리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며 이득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번 사건에선 죄책감을 느꼈다"며 "추모하고 싶은데 서울에 비해 부산에는 그런 분위기가 덜한 것 같아서 직접 마련했다"고 말했다.
노동당 부산시당 청년학생위원회도 20일 오후 6시30분 부산도시철도 부산대역 3번 출구 앞에서 추모식을 열고 여성혐오를 목격하거나 겪었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증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여성혐오범죄, 남녀 간 격론
| |  |
| 동아대 인문학회 카르마가 인문대 앞에 마련한 추모 게시판. |
이번 사건이 많은 여성에게 충격을 준 것은 '내가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여성들의 외침이 이를 반영한다. 사건 이후 여성들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위축됐던 경험과 직접 당했던 폭력 등을 쏟아냈다. 백미경(여·31) 씨는 "친구들까지 모여 대화를 해 보면 성추행·성차별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그동안 만성 여성혐오 현상에 위축되어 온 여성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이 해당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분열 범행'이라고 규정한 것과 언론이 피해 여성을 '○○녀'로 지칭하거나 '여성이 무시해서 죽였다'는 식의 보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1시간30분을 기다려 여성을 살인했다. 정신분열 증세가 남성 앞에선 드러나지 않느냐"고 꼬집었고 "뉴스가 항상 여성의 이야기를 내세워 자극적으로 소비한다"며 보도 행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남성 사이에서는 피의자와 같이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이 불쾌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개인의 범죄로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고 억지로 성 대결을 부추긴다는 주장이다.
범죄심리학자인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인은 자신의 SNS에서 "낯 모르는, 관계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 범행 저변에 일베와 소라넷 등으로 대변되는 비뚤어진 남성중심주의 하위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안세희 기자 ahnsh@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