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암 투병경험 녹여낸 작품
- 고통과 절망을 온몸으로 견디며
- 생을 재발견하고 끌어안는 과정

장편소설 ‘희주’를 펴낸 박향 작가. 강 제공

“그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그렇게 정신적으로 나약해질지 몰랐습니다. 정신의 힘으로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항암을 받고 여러 일을 겪으며 무너지면서, 인간이 … 인간 정신의 힘이 … 이게 맞나 싶었어요.” 여기서 ‘그 통보’란 암이 발병했다는 의사의 통보다. 그 통보를 들은 사람은 장편소설 ‘희주’(도서출판 강 펴냄)의 주인공 희주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작가 박향이다. 최근 다섯 번째 장편소설 ‘희주’를 낸 중진 작가 박향과 이야기를 나눴다.

박 작가는 실제로 암에 걸렸다. 고통스러운 항암, 이어지는 방사선 치료는 2021년까지 이어졌다. “치료받을 때 기록을 남겼다”고 그는 말했다. 고통·분노·절망·안도·희망이 섞인, 개인의 병상 일기 형식 기록으로 짐작됐다. 그는 나중에 이 기록을 들여다봤는데 똑같은 말, 고통스러운 말의 반복뿐이더란다. “그 노트에서 소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덮었죠.” 덮고 나니, 그 기록은 박 작가에게 자꾸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진짜로 덮을 거냐고?

박 작가는 몸·마음이 죽을 만큼 아팠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병이 내 삶을 우리 생을 통짜로 들여다보게 하면서 생에 관한 새로운 발견과 다짐까지로도 이어지는 품이 넓은 소설을 구상했다. 그는 “구상했다기보다 4년 정도 쓰면서 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암 투병 체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면서도, 거기에만 갇히거나 머물지 않고 인간 삶 본연에 관해 깊이 질문하는 완연히 새로운 문학작품으로 확장된다. 그렇게 소설이 개인의 특수한 체험에서 인간 보편 이야기로 가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영성의 존재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소설에서 암에 걸린 희주는 삶의 격랑에 부딪혀 비틀댔지만,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중년 여성이다. 항암에 들어가는 희주가 소설 속에서 내뱉는 원망·고통·두려움의 말에는 날이 서 있다. “일상은 나를 간단하게 배반했다. 삶의 질은 떨어졌다.” “몸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인생 전체에 스며들었다.”(아서 프랭크 저서 ‘몸의 증언’에서 인용).

좀 더 들어보자.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일도 힘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연락이 끊기면 서운하다.” “그러면 암 환자가 그런 것 하나까지 다 신경 썼어야 했나. 갑자기 서운하면서도 알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계속 징징거렸다. 나보다 건강 관리를 못하는, 무절제한 삶을 살면서도 암 따위 걸리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냥 화가 나.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동물은 조용히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기 위해 더 고통스러워지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 누구도 이 아픔을 함께할 사람은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하는 희주의 화살은 평생 우울하게 살며 자신에게 사랑을 쏟지 못한 어머니를 향한다. 그때 두 살 때 죽은 한 아이의 영혼이 희주에게 나타난다. 환청처럼 등장하는 그 아이의 이름도 ‘희주’이고, 암에 걸린 주인공 희주의 언니다. 중년 여성 희주와 두 살배기 영혼으로 나타난 희주 사이에는 기막히고 어이없는 가족사가 숨어 있는데, 암 환자 희주는 어린 영혼 희주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넓어지고 단단해지며 엄마를, 병을, 세상을 조금 더 안온하게 끌어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박향 작가는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얼음꽃을 삼킨 아이’, 소설집 ‘좋은 여자들’ 등을 냈다. 장편소설 ‘에메랄드 궁’으로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받았고 현진건문학상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