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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권상실과 고종책임론 /이만열

개명군주였지만 백성 역량 응집않고 황실 안녕만 추구… 국권 수호엔 한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08 20:45:15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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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라며 요란하던 분위기가 국치일이 지난 지 열흘만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두 차례의 태풍과 그 못지않은 공직사회 비리 때문인가. 강점 100주년은 일본의 참회 못지않게 한민족의 뼈아픈 자성도 촉구했다. 그러나 그런 자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외세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일관되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일제 침략기 치욕의 한 가운데에 섰던 고종(1863~1907)에 대한 재평가까지 이뤄지면서 국망의 원인을 성찰하는 것도 혼미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고종에 대해서는 한말 서양인들 중에서도 그 유약성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를 가까이했던 분들은 그가 성실 유능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본인 중에서도 고종을 암군 아닌 명군으로 평가하는 한편 불운한 군주로 묘사했다. 그러나 침략의 정당성을 강변하려는 일제 관학자들은 '고종암약(暗弱)설'을 내세웠다. 이는 그가 암군(暗君)이며 유약(柔弱)하다는 주장을 합쳐 만든 부정적 평가로서, 국왕이 무능하여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국권을 침탈당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고종 재평가론은 식민사관의 아류로서 횡행한 고종암약설에 대한 반박이다. 고종 재평가는 고종이 수행한 업적과 '광무개혁'으로 대표되는 개혁정책을 과시함으로써 고종이 개명군주이며 서양근세사에 보이는 계몽군주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고종 재평가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측면에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당시 국가 운명의 중심에 섰던 고종을 미화, 면책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국망 원인 분석에서 조선의 약점을 감추고 외세의 침략만 강조하는 타율성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고종 미화론이나 면책론은 역사의 진실을 외면, 왜곡할 수도 있다. 때문에 다음 몇 가지 사례는 고종책임론에 방점을 찍는다.

고종이 성실한 개명군주라는 데에 이견이 없지만, 그가 백성의 힘을 토대로 외세에 처변(處變)하지 않았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19세기 초부터 일기 시작한 농민운동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솟구치는 백성의 역량을 개혁 의지로 묶어내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했다. 갑오개혁이 동학혁명의 요구를 일부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외세를 통해서 강제된 것이지 주체적 역량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동력을 잃어버렸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동학혁명 때에 백성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동력화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권이 그렇게 허술하게 외세에 농락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점은 민권신장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는 독립협회운동에서도 나타났다. 독립협회운동의 한계는 분명 있었지만, 지배층은 민권과 손잡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 힘써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민권을 누르고 황제권을 강화했던 것은 국민의 밑에서부터 치솟는 역동성을 뒤엎어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외세는 개혁주체인 국민과 무능한 봉건지배층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봉건지배층을 조종하여 국권을 빼앗아 버렸다. 백성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봉건지배층은 외세의 협박에 속수무책이었다.

국민의 힘을 억누르고 개명군주 고종이 기도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오직 황실의 안녕이었다. 그런 기도는 곧 국민과 국가가 약화되더라도 황제권과 황실만은 외세로부터 보장받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게 을사조약과 강제병합조약에 한 조문으로 박혔다. 나라를 빼앗기는 판에 황실의 안녕보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때문에 고종의 이 같은 정책은 나라를 구할 수도 없었고, 그의 개명군주로서의 명성도 의심케 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유약성도 드러났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협박, 강요할 때 그는 대신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헤이그 밀사사건' 때도 그는 을사늑약에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사신을 파견했노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결국 발뺌했다. 이런 그가 어찌 난세에 한 나라를 강고하게 끌고 나갈 모험과 용기의 군주라고 하겠는가. 결국 백성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키우지도 않은 고종과 대한제국은 멸망해버렸다. 그러니 백성의 민주적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어찌 100년 전의 역사만이라고 하겠는가.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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