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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이허(以虛), 비워야 채워지는 마음의 무늬들 /김수우

돈으로 치장된 축제나 행사

진정한 문화 가치 왜곡시켜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01 21:01:58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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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몽골 중원을 여행했다. 이어지는 구릉과 초원, 그리고 몇 가닥 비단실로 흘러가는 길과 강물들. 하염없이 달리다 밤이 되면 게르를 찾아 쉬면서 별자리를 헤아렸다. 다음 날 다시 달렸다. 지프로 열흘을 달려도 같은 풍경이었다. 그 광대함, 그건 예비된 세계였다. 양떼나 자작나무숲조차 미리 준비된 평화였다. 삶이란 출생 이전에 예비된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축복을 다 잃어버린 우리들이다.

문화란 이 축복을 회복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문화적인 삶을 꿈꾼다. 주변 모든 현상들이 문화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 몸과 마음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문화적이란 게 무엇일까 곰곰히 궁리해봐야 하지 않을까.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파편화된 개인들이 제조해낸 문화가 과연 행복일 수 있는가. 자본의 도구화 또는 상품화된 문화는 오히려 가치를 왜곡시키고 삶을 더 목마르게 한다.

여행길에서 처음엔 초원의 광대함에 감탄했지만, 나중엔 그 광대함이 아주 여린 풀과 미세한 풀꽃으로 촘촘히 구성되어 있음에 놀랐다. 이허(以虛), 그건 이허의 세계였다. 이허란 비어 있거나 비울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늘보다 커보이는 '비어있음'의 초원은 손톱보다 작은, 각양각색 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어 있으나 허전하지 않고, 가득 차 있으나 포만감을 느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이며 조화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문화도 그런 게 아닐까. 이허, 비워 있어 채워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귀기울임 같은 거 말이다. 비울 때 비로소 광대함이 보이고 광대함을 채우고 있는 사소함이 보인다. 쓰레기 쌓이는 소비적 일상, 공허하게 난무하는 인터넷 대화들이 오늘 문화의 흐름이다. 많은 예산을 들인 축제문화들이 넘쳐나지만 그 행사들이 시민을 진정 행복하게 하는지 의심스럽다. 열흘 전에 대대적인 독서문화축제가 개최되고, 엊그제 부산 문화의 상징이던 동보서적이 문을 닫았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현실인 것이다.

한마디로 돈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문화는 영혼을 상승시키는 문화라고 할 수 없다. 소박한 독서 모임, 작은 대화공간, 풀꽃 같은 인문학적 소모임이 자꾸 생겨야 한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며 산소방울을 뿜어내는 박테리아 같은 작은 만남이 문화의 미래라고 믿는다. 문화가 절대 행사나 축제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조금씩 시민들의 사유가 깊어지고 또 타자의 체온을 감지하는 일상이 향기처럼 번져갈 때, 바로 문화가 축복이 되는 게 아닐까.

문화란 빈 마음에서 비롯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이허의 세계이며, 본래를 의미한다. 우리의 본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조금 부족한 듯 마음을 비우고, 조금 덜 채워진 넉넉한 마음이 문화의 바탕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를 예수는 축복했는데 바로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라는 것이다. 법정스님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르쳤지만 스스로의 청빈함으로 생명의 무늬를 기억하게 하는 것, 그런 것이 문화의 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새로운 광대함을 체험했다. 도시 속에 사람들이 있었다. 관계들이 있었다. 매일 함께하는 그들이 곧 내게 예비된 광대한 자연이라 믿는다. 사람 속에 푸른 하늘과 초원이 있고 길이 있다. 사람 속에 쉴 자리가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만한 자연이 어디 있으랴. 사람만한 문화가 어디 있으랴. 밤마다 동광동 골목길에 서면 낡은 건물 사이로 별이 하나 반짝인다. 밤하늘 가득 지평선까지 쏟아지던 초원의 별들이 별반 부럽지 않다. 비워야 채워지는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면 나와 마주치는 그 모두가 별빛이 아니겠는가.

믿음이란 그 모든 알 수 없는 신비와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란 확신을 뜻하는' 말이라는 아르투어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 의미란 게 바로 너와 나이리라. 문득 희망의 이유처럼 닿는 가을햇살. '너도 바로 평화였단다'. 그건 신의 목소리일까. 내 안의 목소리일까. 문화란 끊임없이 인간의 본래에 닿으려는,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려는 노력이다. 하여 文化란 紋化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무늬가 나를 풍요롭게 한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즐거운 무늬이고, 예비된 선물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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