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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가슴속의 돌개구멍 /하창식

약한 물결 힘 모여 바윗돌도 뚫어 내듯 작은 오해·실수 쌓여 사람 마음에 구멍 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08 21:07:58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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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중순 무렵, 주말을 이용하여 연구실 학생들과 밀양 배내골을 다녀왔다. 하계 휴가기간이 겹친 탓에 그곳에 있는 펜션들의 예약이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8월 휴가기간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예약이 가능하였다. 출발 전날, 우리가 여장을 풀 그곳의 내일 밤 사이에 많은 비가 쏟아질 것이란 일기 예보를 들었다. 어렵게 예약한 터라, 우천불구 일정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장마가 물러날 때인데도 불구하고, 귀한 손님 맞느라 다시 찾아온 모양이었다. 장대비였다. 빗소리와 함께, 펜션 바로 옆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밤새 으르렁거렸다.

빗소리에 잠을 설친 탓일까.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간밤에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다행히도 멈추었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던 비가 물러나자, 먼 산에 물안개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물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더욱 강렬한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던 학생들은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학교를 벗어나 오랜만에 야외에서, 그것도 술잔을 걸치며 온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를 살며시 빠져나와 비 그친 산길을 산책하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선선한 아침 바람에 물에 젖은 나뭇잎 냄새가 내 코를 즐겁게 하였다. 길 아래 계곡 쪽에 맑디맑은 냇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물이 흐르는 그곳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밤새 많은 비가 왔지만, 다행히도 내를 건너기에 위험할 정도로 물이 불어 있지는 않았다. 징검다리 중간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만큼 떨어져 놓여있던 바윗돌에 조그만 돌개구멍이 눈에 띄었다.

저 작은 돌개구멍이 뚫리는 데 몇만 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몇천만 년의 세월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약한 물결이지만 오랜 세월 힘이 모이면 저 굳센 바윗돌에도 구멍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9월 중순, 연구년을 맞아 미국 서부지방의 한 도시로 오게 되었다. 태평양에 맞닿은 이 도시의 해식절벽 아래를 거닐다가 발밑에 놓인 큰 바윗돌에 움푹 팬 돌개구멍이 눈에 띄었다. 배내골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이곳에서 정착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던 중이었기에, 문득 지난 10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역시 미국에 체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학생들을 통해 알게 된, 한 교민으로부터 모종의 청원서에 서명을 부탁받게 되었다. 30년 형을 선고받고 영어의 몸이 된, 한 교포 가장의 감형을 위한 청원서였다. 청원서에 서명을 해 주었다. 전후사정을 전해 듣곤 큰 문화적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서로 호형호제하던 두 이웃이었지만 다툼 끝에 법정 소송에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소송의 직접적인 원인에 덧붙여, 아주 오래전 저질렀던 아동 성추행 사실이 가중처벌을 받게 된 이유라고 하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이라고 했다. 이웃 교민 집 사내아이가 떼를 쓰며 울 때, "자꾸 울면 고추 딴다"하며, 귀엽다는 표시로 아랫도리에 손대는 시늉을 했던 일들이 큰 사건이 되어 고소장에 붙게 된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친지 어른들로부터 대수롭지 않게 경험했던 그 한두 번의 손짓으로 말미암아 30년 형의 가중처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

10여 년 전의 미국 생활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30년 형에 처해진 가장을 둔 그 가족들의 가슴엔 얼마나 큰 돌개구멍이 뚫려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마음이 아파졌다. 이제는 감옥에서 풀려났을까? 증오로 인하여 뚫려진 그 가슴속 돌개구멍은 이제는 메워졌을까. 아니면 10년 세월의 강물에 더 큰 크기로 키워졌을까. 해변 바윗돌, 저 돌개구멍에 쓰였다 지워지고 또 쓰이는 파도의 글씨는 아름답건만, 그 가족들의 가슴에 팬 그 돌개구멍은?

거대한 태평양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다짐하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 혹은 내가 만날 내 이웃들의 가슴속에 나로 인해, 돌개구멍은커녕 조그만 상처도 남기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부산대 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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