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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먹고사니즘과 귀차니즘 /김재기

먹고사는 데 도움 안 된다며 나 몰라라 해버리고 탈법행위 묵인하면 이 사회 썩는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13 19:35:30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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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종식되고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요즘 우리사회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지역, 성별, 계급, 정치적 입장 등에 따라 이념적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이념의 충돌은 불가피하기도 하고, 때론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긍정적 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수많은 이념들이 목청껏 자기주장을 펴며 다투는 것 같아도, 사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의식의 흐름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호남, 남녀, 빈부, 여야, 좌우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의하고 실천하는 이데올로기, 그건 바로 먹고사니즘과 귀차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전문 학술용어도 아니고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태도일 뿐이므로 거창하게 이념이라고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이데올로기라는 게 원래 우리 삶 속에 파고들어 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런 내 생각이 그리 억지스럽지는 않다고 믿는다.

언제부턴가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풍조가 우리사회를 휩쓸고 있다. 진짜 먹고살기 힘든 서민에서부터 내로라하는 부자에 이르기까지, 또 공공업무부터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요,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래전 먹고사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들었을 때보다 웬만큼 '먹고살만해진' 요즘 먹고사니즘이 더 위력을 떨친다는 게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 주장 자체는 크게 시빗거리가 못 된다. 돈이 최고라는 식의 속물적 배금주의에 기대거나 물질적 생산이 정신적 삶도 결정한다는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날의 경험을 통해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도 중요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긴 옛 성현인 맹자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항산(恒産: 물질적 삶의 안정)'이 있어야 비로소 '항심(恒心: 변치 않는 떳떳한 마음)'도 가능하다고!

따라서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 자체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 심지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 먹고사는 게 삶의 궁극목적이므로 다른 모든 건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는 태도가 정당할까?

일반인들은 불법행위를 해놓고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정부 또한 부정의하고 비민주적인 과오를 저지를 때마다 "이게 다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처"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과연 정상일까?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런 변명과 우격다짐 앞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거나 쉽게 용서한다는 점이다. 또 궁극목적에 의해 잘못 정당화된 갖가지 수단들은 다시 또 다른 하위수단들을 정당화하면서, 결국 부정과 불의의 연쇄고리와 그물망이 생겨난다. 예컨대 먹고살기 위해 좋은 일자리를 얻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좋은 학벌을 가져야 하며, 좋은 학벌을 위해서는 입시지옥이든, 과열경쟁이든, 사교육의 기형적 팽창이든, 인간교육의 붕괴든 다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핵심문제들이 뭔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모두가 빤히 아는데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서 고치지 못하는 까닭이 뭘까? 슬픈 일이지만 그 또한 먹고살기 위해서다.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무한경쟁에 올인하고 있는 세상에서 한가롭게 정의 타령이나 하고 있다가는 자신의 밥줄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모든 사람을 악과 불의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먹고사니즘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에 있는 두 번째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귀차니즘이다. 나 먹고사는 문제와 무관한 모든 일은 다 귀찮다는 논리,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논리! 바로 이 논리가 우리 사회를 좀먹고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볼 시간이다. 우린 도대체 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먹고살려고 하는 것일까?

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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