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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공(公)이 없는 시대의 공정사회 /이영식

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올바른 호칭 사용하는데서 시작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18 21:41:2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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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야구가 한창이다.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지 않은 나도 어깨 넘어 곁눈질이나마 TV중계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두산-삼성 전에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장면이 몇 차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은퇴했던 양준혁 선수(?)가 유니폼을 입고 더그아웃에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우리 야구의 영웅이라도 은퇴했으니 현역 선수는 아닐 거고, 선수가 아니니 팀의 엔트리에 들었을 리도 없었을 것인데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것이 이상했다.

마침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SK 감독이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가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같은 경기의 같은 룰이라도 두산 전에서는 묵인되다가 SK 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公)'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쁘게 보면 '지켜지는 것도 없고, 안 지켜지는 것도 없다'가 될 수도 있고, 좋게 보면 그래도 나머지 반의 원리원칙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두산 또는 SK 팬이거나, 안티 삼성이나 안티 양준혁일 거야" 라고 판단해 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경향이 적지 않은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의 옳고 그름은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 이야기가 나에게 득이 될까 손이 될까를 먼저 생각하려는 태도이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과연 내 편일까 아닐까만을 판단하려는 풍조가 팽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참 공(公)이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 해 오고 있던 차에 대통령은 '공정사회' 구현을 천명하고 나섰다.

'공정사회=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라는 등식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원리원칙의 준수가 올바른 호칭과 호칭이 보장하는 명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위에 쓴 '양준혁 선수'라는 호칭은 부적절한 것이었다. 은퇴한 이상 '선수' 대신 '씨'나 '님' 같은 경칭을 붙임이 옳았을 것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왠지 '선수'라면 더그아웃에 앉아도 될 것 같고, '씨'라면 일반인이라서 더그아웃에 앉을 수 없음을 금방 인지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조금 전까지 부르던 관습 때문에 바꾸지 못했던 호칭의 잘못과 어제까지 더그아웃을 지키고 있었던 선수였기 때문에 선뜻 내보낼 수 없었던 잘못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중계를 담당한 아나운서나 해설자가 여전히 그를 '선수'로 불렀기 때문에 엔트리에 없어도 더그아웃에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을 수도 있다.

요즈음 TV드라마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김 교수, 이 검사, 김 변, 이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왕왕 본다. 이 몰지각한 호칭의 문제를 지적하기는커녕, 일부에서는 좀 있고 높으신 분들의 훌륭한 언어습관처럼 인식하거나 흉내 내려는 경향까지 있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사모님'이란 말이 무차별적으로 전파되어 가던 때와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대학에서조차 동료교수의 부인을 '사모님' 대신에 '부인'이라 부르면 언짢아하는 이들이 있다. '사모님'이란 원래 스승의 부인을 뜻하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는 대통령이란 직함보다 박사란 존칭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던 시대가 있었다. 대통령이라는 공무수행자로서의 평가보다 인격적 지도자로서의 호칭이 선행했던 까닭에 정권의 부정이 감추어지고 독재의 기간도 늘어나게 되었던 측면이 있다.

공(公)이란 숨김없이 드러내 놓는 것이다. 투명성을 위해서는 왜곡이나 과대포장되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한 명분과 올바른 호칭이 요구된다. 성경에서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고,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창조신화에서는 천지에 이름이 없었을 때를 혼돈의 카오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름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호칭이야말로 모든 창조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었다'고 노래하였다. 이름은 개인의 본질을 가리키고, 개인의 본질을 공적 공간으로 불러낸다. 호칭에 의해 사(私)가 공(公)이 되는 것이다. 호칭의 잘못과 인플레는 공정사회의 기본이 되는 공(公)에 대한 기준부터 흐리게 한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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