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조용해졌다. 팽팽한 긴장감과 흥분, 게다가 적의(敵意)마저 출렁이던 경기장이 갑자기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지난달 27일 부산시장 후보 경선을 정점으로 한나라당 지방선거 후보가 대부분 결정된 직후 부산 경남 울산지역 선거 관련 분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예선전이 끝났을 뿐 정작 중요한 본선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벌써 관전자들은 볼 거 다 본 양 자리를 뜨고 있다.
올해는 지방의원 유급제와 기초의회 의원 공천제가 처음 시행되는 터라 어느 때보다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예선전이 시작됐다. 공천 신청자는 예년에 비해 많았고 젊은 전문직 인사들의 비율도 역대 최고였다. 이번 지방선거가 예년과는 달리 흥미 있는 게임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러나 공천자 결정이 임박하면서 '역시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해 지역 국회의원이 경선도 치르지 않고 특정 인물을 전략공천한다며 연일 시끄러웠고, 돈 공천을 했다는 폭로도 썩은 생선 냄새 풍기듯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재미없는 선거인데 예선전이 이 모양이다 보니 시민들은 쓴 입맛을 다시며 지방선거 얘기에 손사래를 치곤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재미없는 선거를 지켜봐야 하나."
그리고 이런 푸념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게 다 우리 책임이다. '돈 공천'을 받았건 '사천(私薦)'을 받았건 내보내는 대로 당선시켜 줬으니 이럴 만도 하지."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해도 너무한다. 유권자인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며 격앙된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유권자들이 스스로 '지역주의 투표'의 폐해를 드디어 체감하고 있다는 징후들이다. 선거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게 '지역주의 구도' 때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지역주의 투표는 유권자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위정자들이 지역주의 전략을 쓰는 데야 뾰족한 수가 없다. 문제는 지역주의 투표는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해도 개인과 국가 전체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된 것은 유권자 개개인이 그 폐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 예선전을 지켜본 시민들의 이 같은 반응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 지역주의 투표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선 유권자 스스로 이것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선거 때마다 헤어나지 못했던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자.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분석할 때 흔히 인용하는 '죄수의 딜레마'란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내쉬의 게임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공범 두 사람이 붙잡혔다. 경찰은 한 사람씩 다른 사람 몰래 불러 "너희 범죄는 징역 10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다, 그러나 자백하면 징역 1년만 살도록 해 주겠다"고 구슬린다. 이들은 둘다 입을 다물면 무죄를 받을 수 있지만 동료가 자백을 해 버리면 자신만 중형을 받을 게 두려워 십중팔구 자백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지역구도 속에 갇혀 있는 유권자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가 지역주의 투표를 하지 않더라도 저쪽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우리만 손해보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지난 17대 총선 후 영남 지역의 특정 정당 '싹쓸이'에 대한 자성을 진지하게 고백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항의를 들어야 했다. "저쪽은 더 심하다." 이제는 지역주의 투표를 한 양쪽 다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존 내쉬는 게임이론에서 경쟁자들이 '윈-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쪽이 모두 최선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선거 때마다 시달려온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일까. '인물 본위의 투표'란 말은 너무 식상하다. 아예 '죄수의 딜레마'를 뒤집어 '저쪽은 이미 지역주의를 극복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다짐을 한다면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본선이 더욱 흥미진진한 선거를 경험해 보자.
사회2부장 pin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