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영도다. 앞으론 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가 보이고 뒤로는 고갈산(봉래산)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매일매일 산으로 바다로 놀러다니는 게 일이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진 해 저물면 그만 밥 먹자는 할머니 손에 끌려 들어가는 날들을 보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의 여린 가지 끝까지 올라 바람을 탈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는데, 아름드리 나무가 엄지손가락 굵기만해진 곳에 매미처럼 붙어서 해야 하는 일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타잔처럼 타고 다니다가 떨어졌을 때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동네 오빠들의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뽑아내고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는 도로를 하나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그 바다에 방파제가 있어서 학교가 파하면 방파제에서 게를 잡으며 놀았다. 산딸기 오디 무화과 개복숭아 석류 머루 등은 손에 잡히면 신나게 먹었다. 중학교는 고갈산 중턱에 자리 잡아 고개만 돌리면 수평선으로 가득 찬 바다를 볼 수 있었는데,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는 찬란했고 여름이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풍덩풍덩 그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초경이 왔던 그날도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체육복을 갈아입으려 했다가 놀라 집으로 달려온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는 집이 이사를 해서 하단에 있는 여고로 가게 되었고 지는 해 주위로 퍼지는 붉은빛은 낙동강과 그 하늘을 한참을 물들이다 사라지곤 했다. 매일 되풀이되는 낙조는 쓸쓸함이기도 했지만 장렬하기도 해서 사춘기 여고생에게 눈물을 흘리기 적당한 때와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뭉친 일곱 명의 친구들은 승학산을 뒤지며 아지트를 찾아다녔고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이라 대신동 꽃동네까지 산을 탔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학교 가기 전엔 아침부터 놀았고 초등학교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대낮에 놀았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해가 없는 저녁이나 주말에야 놀 수 있었고, 대학 다닐 때는 4년 내내 야학을 해서 자정이 넘은 새벽에야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해야 하는 일들이 놀이가 될 수 있게 궁리를 하게 되었는데, 졸업을 하고 보일라를 하면서는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전시를 보는 게 놀이였고 지금도 그보다 더한 놀이는 없는 거 같다.
자연과 노는 방법을 아는 것만도 숨이 찼던 어린 시절이 요즘 들어 더욱 떠오르는 건 광안리로 이사오고부터다. 파도가 센 날에 파도를 타는 것이 얼마나 스릴 있는지, 해변 그늘에서 읽는 글들이 얼마나 달짝지근한지, 눈이 피로하지 않고 어깨가 뭉치지 않으면서 잠이 잘 온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무엇보다 바다 근처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건지.
피서를 가려면 우리 집으로 오라고 친구들과 작가들에게 문자를 치고 멀리서 온 손님들을 받으며 에어컨 없이도 여름을 보낸다. 휴가차 내려온 손님들은 이런 부산을 부러워하고 부산에 사는 나는 우쭐해진다.
'논다'는 건 참 중요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사실은 먹고사는 건 기본이고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노느냐가 더 중요하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알고 보면 자고 일하는 나머지 시간을 얼마나 잘 노는가보다 중요하진 않다. 또 잘 노는 것은 돈을 쓰거나 특별한 어떤 곳에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짜로 놀이를 제공해주는 산과 들과 바다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어먹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신문에 강남권 아이들은 놀이도 고액과외를 한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바다와 산을 끼고 살았던 나로서는 참 이해가 안 되는 안타까운 일이구나 생각했다. 서울과 달리 좋은 전시회와 공연이 턱없이 부족한 부산이지만 자연환경은 어느 도시에도 빠지지 않는 곳이어서 부산의 아이들은 서울의 아이들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바다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는 조카와 산딸기를 마트에서만 보았다는 친구 딸을 대면하자면 이건 뭔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광안리 불꽃축제도 벡스코에서 열리는 다양한 체험전도 중요하지만 태종대 해운대 송정 송도 다대포 광안리 바다가 어떻게 다른지 부산의 산 중 어디가 제일 높고 어떤 산책로가 있는지부터 알려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해운대 해변에 파라솔이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 빽빽한 도시, 전국의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부산에 사는 아이들에게 바다는 제일 큰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문화잡지 보일라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