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서 살다 보니 주로 산촌의 농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 정해진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다가다 마주치면 그 순간에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으며 각자 일하는 곳으로 돌아가곤 한다.
산중 생활에 서툰 내가 주로 묻고 농부들이 답을 한다. 농부들의 답을 들어 보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엿보인다. 쌍봉다원의 고 씨 부부는 차나무에 절대로 농약을 치지 않는다. 자벌레가 찻잎을 갉아먹지만 내버려둔다. 찻잎의 3분의 1은 자벌레 몫이고 나머지는 그들 부부 몫이라고 한다. 욕심을 내지 않으면 미물과 공생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부부의 주장이다. 게다가 자벌레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육식하는 벌에 의해 개체수가 불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 씨는 밭농사 작물의 씨를 뿌릴 때 늘 넉넉하게 파종한다고 한다. 산비둘기나 꿩들이 쪼아 먹을 것을 감안해서 그런다고 했다. 이제는 나도 산새들 먹이까지 계산해서 씨를 많이 뿌리게 됐다. 조금 더 수확하겠다고 치사하게 씨앗에 약을 바르거나 비닐을 덮지 않는다. 산새들의 춘궁기가 길어진 탓에 참깨 씨를 세 번이나 뿌리는 수고를 했지만.
산중의 농부들은 불교의 연기(緣起)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연 속의 생명들과 공생할 줄 안다. 내가 사는 산중에도 한 영악한 농부가 쌀 수확을 늘리기 위해 독성이 강한 농약을 자기 논에만 몰래 사용하다가 가족 전체가 처음에는 병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 신세를 오랫동안 졌다고 한다. 욕심을 과하게 부리다가 병원으로 간 사례다.
나에게 김장고추를 판 오 씨는 해마다 고추농사로 수입을 많이 올리는 농부인데, 올해는 300근만 수확하고 말았다고 말한다. 고추가 익을 무렵에 살충제를 두어 번 뿌렸으면 배 이상은 땄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내 산방으로 찾아온 오 씨에게 나는 발효차를 우려주면서 위로했다. 지금은 잃은 것 같지만 살다보면 그 선한 마음으로 인해 얻을 복이 많을 것이라고. 불가의 문법으로 표현하자면 선인선과(善因善果)인 것이다. 이곳은 대부분 계단식 다랑이 논이다. 논두렁이 자연을 닮아 곡선이다. 그 곡선을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논두렁 옆으로 걷다 보면 여물어가는 벼가 말할 수 없이 향기롭다. 솥에서 밥이 되어가는 향기와도 같다. 입안에 침이 고이고 살맛이 나게 한다.
욕심만 조금 줄인다면 마음만은 이 산중이 바로 극락이다. 조주 선사의 오도송이 저절로 읊조려지는 산중의 가을이다.
봄에는 꽃들이 피고 가을에는 달빛이 밝다/ 여름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린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좋은 시절이라네.
문제는 조주 선사의 경책처럼 인간의 쓸데없는 생각이나 욕심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번뇌 망상이다. 산을 아는 사람은 산이 왜 아름다운지 안다. 산은 우리가 아는 소나무나 잣나무 몇 그루 때문에 수려한 것이 아니라 수만 가지의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산색(山色)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산중생활에 제법 익숙해지면서 자연으로부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어렵게 얻은 지혜가 아니다. 날마다 마주치는 마당가의 연못에서 보았다. 산중이라 찬물에도 잘 사는 수련을 몇 해 전에 심었는데, 올해는 탐스런 꽃을 보지 못했다. 수련이 왕성하게 번식하여 연못을 뒤덮더니 잎들이 작아졌고 꽃도 피는 둥 마는 둥했다. 연약한 개연 종류는 자취를 감추고 없다.
자연의 섭리는 공생이지 결코 한 생명의 독주나 정복이 아니다. 정복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인간의 습성일 터이다. 최근에 어떤 목사가 자신들끼리 한 얘기라고 항변하지만 '불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우기는 것을 보면 몹시 안타깝다. 언행이란 어느 장소에서나 같아야 하는 법이다. 어느 지자체 장이 기독교 성시화를 위해 시 예산을 집행하겠다는 둥, 일부 기독교 목사와 신자들이 법당이 무너지라고 기도하더니 마침내 전도 차원을 넘어 한 종교의 뿌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다다른 느낌이다. 배려 없는 인간의 독식 근성이자 저열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그 수준이 형편무인지경이라 대꾸할 가치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만 티끌 하나를 더 얹고 만 것 같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