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 생일이 열흘 전이라 아빠 생신도 이즈음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솔직히 엄마가 어제 전화하셔서 알았어요. 엄마는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씀드리라지만, 아 또 제가 솔직하잖아요. 아빠, 제가 태어날 수 있게 아빠가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엄마랑 아빠가 매일 제 블로그에 들어오셔서 동태를 살피고 전화하시는 거, 참 고맙게 생각해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매일매일 팍팍 들거든요. 독립한 지 십수년이 지나도 얼굴보고 싶다고 오라고 하시기보다는 매일매일 전화를 걸어주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서로 상처주지 않는 관계라는 게 얼마나 훌륭한 건지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 잘하는 기억 더듬기를 해보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편두통에 막 시달려도 아빠나 엄마냄새 맡으면 괜찮아졌었어요. 시험 날 아파서 막 엉엉 울고 들어와도 아빠가 괜찮다 괜찮다 해주신 것도 기억나요. 아빠 머리냄새랑 엄마 베개냄새를 제일 좋아했던 거 같아요. 안심이 되거든요.
엄마랑 할머니가 자주 싸우셔서 아빠가 힘드셨을 때도 아빠가 술을 마시거나 짜증을 내거나 화풀이를 하지 않고 그냥 혼자서 감당하시는 거 보면서 아빠가 너무너무 착한 사람이라 고마웠어요.
아빠가 회사갔다 돌아오실 때마다 빵이며 통닭이며 과일을 들고 들어오셨던 분이었던 것도, 우리보다 더 소년중앙 보물섬을 먼저 보려고 하셨던 분이었던 것도 좋아요. 아빠랑 서로 만화 그려서 주고받았던 것도 기억나요. 집이 갑자기 힘들어져서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비웠을 때, 그런 아빠가 계셔서 저는 그렇게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았던 거 같아요. 돈벌이 때문에 엄마랑 아빠가 혹 헤어지지나 않으실까, 우리 가족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 많던 절 엄마랑 아빠가 매주 중간에서 만나던 대구의 여관에 데려가 주셔서 고마워요. 중학교 때, 그 일이 신앙이 되어서 가족이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고 우리의 사랑이 참 강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 전교조 선생님들의 연극표를 팔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할 뻔한 걸 아빠가 학교에 와서 따져주신 것도 고마워요. 덕분에 퇴학은 면했지만, 사실은 그때 다르게 살고 싶어서 퇴학당하고 싶었던 게 제 마음이었지만요. 그래도 아빠, 아빠가 절 얼마나 믿고 계신지 그리고 그 믿음이 절 얼마나 당당하게 하는지 알았어요. 공부에 흥미를 잃어서 꼴찌한 성적표를 보고도 아빠가 웃어주셔서 다시 공부할 의지가 생겼어요. 미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때 집이 너무 어려워서 힘들다고 말씀하셔서 전 슬프고 화났지만, 몰래 미대입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모른 척해주시고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렇게 대학을 가게되어 저는 좋았어요. 제 의지로, 제 힘으로 한 일이니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는 거,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인 걸 배웠어요.
자식 셋이 모두 대학을 다녀서 집안이 휘청할 때, 오빠랑 정현이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으려고 하는데도, 대학 내내 야학한다고 보탬이 못된 거 죄송해요. 장학금 한 번 못 타는 저에게 "너 하나라도 세상에 좋은 일 하고 살아라"하셨던 아빠 말씀에 지금도 저는 그렇게 살려고 해요. 아빠가 너무 퍼주기만 하는 저에게 "네 것이 열 있어야 하나둘도 줄 수 있지 하나밖에 없으면 줄 수 없다"는 말씀을 야학 다닐 때 해주셔서, 이제껏 통장 잔고 바닥 난 적 없이 보일라를 찍을 수 있었어요. 어떤 날 아빠에게 세상 어려워도 아빠가 있어서 든든하다고 말했을 때, 아빠 눈이 순식간에 빨개진 것도 기억나요.
제가 일찍 독립한 것을 지지해주셔서 고마워요. 전세금 주셔서 보일라 창간호 만들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가족을 너무 사랑해서 그게 힘들어서 집을 나왔지만 믿음이 있어서 얼굴 못봐도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으로 살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누가 절 싫다고 하거나 나쁜 사람이라 해도 잘 안 믿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거 아니까. 기억하고 기억해봐도 나쁜 기억이 별로 없는 과거를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아빠, 엄마한테도 말씀드렸지만 아쉬울 때 제일 먼저 연락주세요. 옛날부터 엄마 아빠가 같이 살자하시면 살아야지, 두분 아프시면 다 때려치우고 간병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 없었던 것도 감사해요.
여하튼, 아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아빠가 계셔서 제 맘대로 살고 있으니까요. 아빠가 제 아빠라서 정말 고맙고 좋아요, 생신 축하해요.
문화잡지 보일라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