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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山房<산방 >을 찾은 가을 손님들 /정찬주

선친의 영가가 편안하다 해준 고마운 손님과 함께 한 하루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8-11-21 20:23:5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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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첫눈이 왔고 오늘은 하루 종일 늦가을 비가 내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길목이서인지 가을비에서는 가을의 체온이 느껴지고 첫눈의 잔설에서는 겨울의 혼을 보는 것 같다. 하늘이 잠깐 갠 오후 2시쯤 손님 세 분이 왔다. 조선중기의 명유(名儒) 기대승의 삶을 흠모하여 장성 월봉서원 옆에 사는 강기욱 선생, 사업가이지만 만행을 좋아하는 이재형 선생과 상대의 전생을 보고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도록 도움을 주는 강응길 선생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내년이 환갑인 독서광 이재형 선생이 얘기 도중 "나는 속이 없는 사람이오"라고 한 말에 내가 "속이 없다는 것은 무아(無我)를 뜻합니다. 나를 없애고 세상과 한 몸이 되는 것이 무아입니다"라고 답했던 말이나, 강기욱 선생이 산방 위치를 묻기에 "뒷산 정상이 보성군과 화순군의 경계입니다. 정상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허공에서 바람을 만나 보성으로 떨어지면 섬진강이 되고, 화순으로 떨어지면 영산강이 됩니다"라고 했던 얘기도 그들이 돌아간 지금 '어찌 바람과 빗방울의 인연만일 것인가' 하고 상념에 잠기게 한다.

전생을 본다는 강응길 선생이 손님 중에서 가장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현재 하는 일은 대부분 전생에 하던 일과 연결되어 있더라는 강 선생의 말은 '법화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강 선생은 내 전생 얘기도 길게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내가 보지 못했던 삶이기에 자못 흥미롭고 어떤 부분에서는 생뚱맞게 들었다. 나는 신라시대에 화랑이었는데, 특히 달리는 말을 타고 화살을 잘 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라가 망하자 고구려 땅으로 건너가 사냥을 생업으로 하면서 살다가 원효스님의 사상에 심취해서 그동안의 살생을 참회하고는 이후 생부터는 법사가 되어 비승비속으로 절에 드나들었다는데 특히 '대승기신론'에 달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법사를 하는 동안 경학(經學)에 어두운 스님들을 무시한 업을 지어 지금은 그 업을 씻는 한편 복을 짓기 위해 고승들의 삶을 기리는 글을 쓰고 있다고 얘기했다.

앞으로는 고승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글을 쓸 것이라는 강 선생의 말은 나를 내심 놀라게 했다. 얼마 전부터 나는 고승의 제자들 얘기도 글로 써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구상 중에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발간한 중국 10대 선사 이야기인 '뜰 앞의 잣나무'를 집필하면서 친분이 있는 전국의 선원장 스님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문득 이 분들이야말로 인간정신을 갈고 다듬는 인간문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부터라도 이분들의 삶을 기록해 남겨야겠다고 계획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왜 수행자들이 존재하는지 그 까닭을 알리는 것도 내가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고, 판소리나 도자기 등을 잘 만드는 명인에게는 인간문화재라고 하여 정부 차원에서 보호하면서 정작 인간정신을 아름답게 고양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왜 그런 사회적 명예를 부여하는데 인색한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손님들이 고마워 지리산 야생차를 꺼내 우려서 권했다. 강 선생은 거실에 걸려 있는 선친의 초상화를 보더니 생전에 복을 많이 지은 분으로 영가가 아주 편안한 곳에 계신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불효자인 나는 그 말에 솔직히 위로를 받았다. 동시에 선친을 실망시켜 드렸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선친은 아상(我相)이 강한 나를 염려하여 작고하시기 전에 유언으로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접대하라(接賓客)"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선친은 자라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손자 손녀가 아니라도 누구의 자식이건 간에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주고는 즐거워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친이 사용하던 지갑에 깨끗한 지폐를 넣은 뒤, 유택(幽宅)에 누우신 선친의 가슴에 안겨드렸던 것이다. 내생에서도 남에게 베풀고 그곳의 아이들을 사랑하시려면 당신의 지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녁시간이 되어 나는 손님들을 면소재지 식당으로 안내하여 수제비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또 차를 서너 잔 마신 뒤 헤어졌다. 차갑지만 왠지 포근한 느낌의 가을비와도 같았던 선친이 그리워서 그랬던 것 같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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