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가 달랑달랑해지거나, 몸이 아프거나 하면 '나는 왜 보일라를 하고 있나'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고등학교 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대학 때는 대안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졸업할 즈음에는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하려고 준비했었다. "뭐든 시작하면 십년은 하라"던 아르바이트 회사 사장님의 말씀에 보일라도 10년은 해야지 하고 시작했지만, 이제 7년째이니 3년 남았구나 하면서 시간 가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뭐가 됐든 직장에 다니고 싶은 마음보다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던 것은 분명하다. 업(業)은 먹고 살 돈 이외에 나와 함께 성장하고 그 자체가 나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가끔 사람들이 당신의 직업은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실제로 돈을 벌고 있는 편집디자이너로 나를 소개해야 하는지, 잡지의 발행인으로 소개해야 하는지 모호해질 때가 많다.
거래처에선 나를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결제를 요구하고 작가들은 나를 편집장님이라고 부르니까. 경기가 무섭게 나빠지고, 아 이대로 돈도 벌지 못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돈마저 보일라를 내면서 다 써 버리면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맘때,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는데, 다원예술매개공간 실태조사라는 이름도 모호한 일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다원영역에서 공간은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하는 것에 대한 기초조사라 하겠다. 덕분에 나는 부산의 그런 공간들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대안공간 반디, 대안문화공간 아지트, 극단 새벽의 시지프스의 하늘 등이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이지 않다. 여기서 일반적이란 건, 직장의 개념으로 일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돈이 될 리가 없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대안공간 반디'는 광안리 목욕탕에 둥지를 틀고 있다. 보일라 사무실도 광안리라 산책하면서 전시도 보고 수다도 떨고 그런다. 올해는 반디가 10년째 되는 해다. 매번 다음 전시로 바쁜 와중에도 비평매체를 준비하기도 하고 작가와 기획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시 작가들의 도록을 만들어 해외에 발송까지 한다. 이들은 오로지 지역의 미술인들이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는가에 온 관심이 쏠려 있다.
'대안문화공간 아지트'는 장전동 어린이집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대 앞에서 시작한 거리축제 '재미난 복수'를 만들던 사람들이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함께 만든 곳이다. 이곳에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스튜디오와 합주실 작가들을 위한 숙소까지 만들어 놓았다. 6년째 재미난 복수를 하고 있는 그들은 왕성하게 부산전역의 유의미한 축제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들의 목표 또한 젊은 예술인들의 교류고, 그로 인한 지역 문화예술의 성장이다.
'시지프스의 하늘'은 24년 된 극단새벽에서 운영하는 문화쉼터다. 작은 공연과 인권영화제 등 시류에 민감한 토론회와 세미나가 열린다. 극단 새벽은 연극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집단이지만, 독립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느껴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만나고 그 안에서 의미있는 관계와 실천적인 활동이 새로운 문화예술인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조사를 진행하고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들은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데, 한 가지는 원래 목적이던 공간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직업에 관한 것이다. 지역의 비영리 문화예술 공간에는 당연히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 여기서 지원은 지지하여 도운다는 말이다.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시장의 논리와는 거꾸로 가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는 일이다. 지역의 문화단체들은 오랜 기간 그 역할을 하면서, 사람을 모으는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사람을 키운다. 그래서 행사에 대한 지원도 있어야겠지만, 공간과 사람에 대한 지원이 더 중요하다. 과정과 역사를 살피고 그 역할에 대해 지지하는 구체적인 도움 말이다. 우리 동네 목욕탕에선 재미난 전시를 볼 수 있고, 폐가였던 어린이집에선 예술가들이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연극워크숍에 참여해서 배우가 될 수 있고, 멀티플렉스에선 절대로 틀어줄 리 없는 독립영화를 볼 수 있다. 갈지자로 가는 듯 보여도, 내가 꿈꾸던 직업이란 것도 결국엔 그런 근사한 일을 하는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사하다. 다음부터 나는 보일라 발행인입니다라고만 소개해야겠다.
문화잡지 보일라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