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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호모 비안스를 위하여 /김재기

떠나자 핏속을 흐르는 방랑의 유전자 따라 이 궁핍의 시대 메마른 영혼 적시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7-22 20:56:50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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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달으면서 바야흐로 휴가철이 되었다. 휴가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좋아하는 건 여행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행이라 해도 간단한 나들이에서부터 몇 주 이상이 소요되는 원거리 장기여행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방법이 무척 다양하겠지만, 하나같이 떠나는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삶에 특별한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것이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찌 보면 바로 그 즐거움 때문에, 오늘날 여행이란 "돈과 시간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잠시 짬을 내어 어딘가로 놀러 가는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여행을 하나의 오락이나 소비행위로만 이해하고, 심지어 불요불급한 낭비로 치부하기도 하는 것이다. 해마다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1000만 명이 넘는 요즘에도 '해외여행=과소비'와 같은 해묵은 등식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또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이란 과연 단순히 노는 것에 불과할까? 물론 오늘날의 여행은 놀이 또는 레저로서의 속성이 강하다. 하지만 놀이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는 근원적 항변은 제쳐놓더라도, 여행을 단순히 노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편협하고 피상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근대적 관광여행이 시작된 것은 서구를 기준으로 삼아도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사실 여행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만큼이나 길다고 볼 수 있다. 원시 인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먼 조상은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지구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고 한다. 수십 수백만 년에 걸쳐 이루어졌을 그들의 대이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여행이었겠지만, 그렇게 태고적 이야기로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선사시대 이래 인류가 수많은 곳을 옮겨 다니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수렵채취시대에는 떠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바로 삶이었으며, 이런 전통은 농경문화와 더불어 인류 문명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유목민들의 삶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록 농경문화가 선진문명의 주역이 되면서 인류의 대다수는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도 여행은 인류 문화의 보편적 특성으로서 제값을 톡톡히 해왔다. 사람들은 때론 교역을 위해서, 때론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때론 종교적 사명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오로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열 하나로 고되고 위험한 여행을 계속했으며, 이렇게 세상을 주유하는 여행자들 덕택에 각 지역의 문명은 자기만의 껍질을 깨고 나와 다른 문명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더 다채롭고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비안스(Homo vians), 즉 여행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비록 정주민의 삶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행이라는 말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 묘한 흥분과 긴장, 끝 모를 기대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어쩌면 우리들의 핏속에 보이지 않는 '방랑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물은 철따라 이동은 할망정 결코 여행하지 않는다. 여행은 인간만의 특권인 것이다. 여행이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현실의 삶을 떠나 의식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그 일차적 목표가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여행에는 일정한 불편과 불확실성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런 어려움과 대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더 넓고 깊은 단계로 진입한다. 여행은 닫혀있던 우리의 시각과 감성을 열어젖히고, 정체되어 있던 우리의 사고를 변화시키며, 좁은 울타리에 갇힌 자아를 해방시켜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성취는 아마 삶과 인간에 대한 수준 높은 애정일지도 모른다.

올 여름 여행을 떠나보자. 기간이나 장소가 문제는 아니다. 단순한 유흥이나 휴식으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숙시키는 여행을! 삶의 향기가 메마르고 인문적 교양이 홀대받는 이 궁핍한 시대에 젊은이들의 영혼을 적셔야 할 것은 토익책이 아니라 호모 비안스의 외침이 아닐까?

경성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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