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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박정희 시대, 이명박 시대 /제정임

비판세력 밥줄 끊고 표현의 자유 억누른 민주주의 퇴행기로 기록되고 말 것인가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0-26 21:00:00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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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아침,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등굣길에 신문 호외에서 '대통령 유고' 소식을 봤다. 학교가 청와대 부근에 있어 대통령의 해외방문 때마다 길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데 동원됐던 우리는 가깝게 느꼈던 국가원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몇몇은 소리 내 흐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한 친구의 짧은 외침이 교실을 또 다른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독재자 XX, 잘 죽었어."

하얀 교복 깃을 빳빳이 다려 입은 단발머리 여고생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이 거친 한마디는 시대의 진실을 감춘 벽장을 여는, 녹슨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후 그녀의 오빠가 학생운동을 하다 모진 고초를 당했으며, 그녀의 가족들처럼 '박정희 정권'을 맹렬히 증오해 온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잠깐 '박 대통령이 과연 그녀의 오빠 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대통령이 직접 대학생을 잡아 들여 고문하라고 지시했을까? 어쩌면 박 대통령은 알지도 못하는 사건 때문에 한 가족의 사무친 증오와 저주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든 생각은 '억울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 폭력적인 수단으로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체제를 만든 장본인인 만큼, 그 조직의 하수인들이 벌인 일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변호사를 상대로 국가정보원이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MC 김제동과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오래 맡아 온 TV 프로그램에서 '잘린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도 30년 전의 의문이 되살아났다. 대통령은 과연 이 일을 알고 있을까? 그러라고 지시를 했을까? KBS 정연주 사장이 나중에 무혐의로 밝혀진 이유로 쫓겨나고, 방송인 정관용이 모든 프로그램을 박탈당했을 때,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검찰에 잡혀갔을 때, MBC 뉴스의 신경민 앵커가 하차하고,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온갖 강의에서 잘렸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중 어떤 일은 대통령이 지시하거나 묵인했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알지도 못하는 아랫선에서 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의중을 헤아린 해당 기관이 '알아서' 조치를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모두 차곡차곡 쌓여서 '이명박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을 도무지 참아주지 못하는, 그래서 밉보인 사람들의 활동 기반을 무너뜨리고 '밥줄'을 끊는 정권으로 손가락질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권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민주주의의 퇴행기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업적으로 아무리 '박정희시대'가 화려하게 재조명되어도 '군사 독재'의 꼬리표를 뗄 수 없듯, 이 대통령이 사재까지 털어 애쓰는 모습을 보여도 이 상태에선 불명예스런 역사의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딱 5년밖에 할 수 없는 대통령 자리다. 그리고 그 시대의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 이명박 대통령도 정말 잘하고 싶은 진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서둘러 바로 잡아야 한다.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이 대기업들에게 은밀한 압력을 넣어 시민단체 후원에서 손을 떼게 했다는 등의 '폭로'를 했다. 국정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친다. 사회운동에 헌신해 온 박 변호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보기관이 대기업, 공기업들에 은근히 부담을 주어 비판적 신문, 방송사의 광고를 끊는다는 얘기는 기업관계자들의 입에서 나와 언론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 대통령이 진정 '선진화'를 이룬 지도자로 기록되고 싶다면, '친서민정책'을 명실상부하게 만들어 가는 것과 함께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 비판을 억누르는 권력기관의 횡포에 제동을 걸고, '쓴 소리도 듣겠다'는 자세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이런 뜻을 거스르는 아랫사람과 조직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처음엔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에 큰 진전을 이룬 정부'로 기록될 수 있도록.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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