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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영어몰입교육 대신에 한자 교육을 /정지창

성과 · 한계 고려없는 강박적 영어교육보다 전통문화에 맞닿은 기본한자교육 더 중요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1-23 20:51:49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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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싱가포르는 영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삼는 이중언어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웬만한 싱가포르 사람은 영어와 중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고, 이것이 중계무역과 관광에 의존하는 강소국(强小國) 싱가포르의 경쟁력을 키운 원동력이 되었다고 우리나라의 영어몰입교육론자들은 주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관유(李光耀) 전 수상이 자신이 도입한 이중언어정책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고백했다. 겉으로 보기엔 영어와 중국어를 모두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어와 중국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국제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언어를 이용한 관광 안내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나 복잡한 정보의 전달에는 한계가 드러났다는 얘기로 들린다.

전 국민에게 영어교육을 시켜 국제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우리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잦아들어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인 양 너도나도 '어륀지'식 영어교육에 몰입하고 있다. 수많은 원어민 강사의 채용과 값비싼 각종 영어검정시험, 어린이 조기 유학과 어학연수 등으로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데도 그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남들이 다들 하니까 나만 안 하면 뒤처진다는 강박증에 떠밀려 학생과 학부모, 기업과 정부가 맹목적으로 영어에 매달린다. 이런 식의 영어 몰입교육은 전통시대의 한문 몰입교육보다 그 강도나 열기가 드세다. 예전에는 이른바 양반 사대부층만 한문 교육에 매달렸지만, 요즘은 계층에 관계없이 전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맨다. 한시(漢詩) 짓는 솜씨를 보고 관리를 등용하던 시대보다 토익, 토플 점수로 대학생과 신입사원, 관리를 뽑는 요즘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가?

전통시대의 한문교육과 오늘날의 영어교육은 사교육비를 비롯한 사회적 비용 면에서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문교육을 위해 자녀들을 중국에 유학 보내거나 성균관이나 서당에서 중국인 선생들을 초빙해 '한시작법' 특강을 하지는 않았다. 요즘의 교육관료들은 예전에는 국민소득이 낮고 국제화가 되지 않은 탓이라고 강변(강조가 아니다)할지도 모른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강조'와 '강변'을 구분하지 못한다.) 영어는 과연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데 그렇게도 중요한 요소인가? 영어교육 열기나 토익, 토플 점수가 우리보다 낮은 일본이 과연 우리보다 국제경쟁력이 낮다는 말인가? 영어가 필요한 무역과 외교, 관광 종사자들만 현지에 보내 집중훈련시키는 것이 효율성과 비용 면에서 훨씬 낫지 않을까?

중국에 나라의 운명이 종속돼 있던 전통시대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아니면 영어에 나라의 명운이 달렸다고 생각하는 국제화·세계화 추세 때문인지, 영어교육 열풍에 비해 한문교육은 이상하게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기본한자를 배우지 않게 되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주던 출판계의 관행도 한글전용으로 바뀌었다. 책과 신문과 간판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뀐 지도 오래다.

나는 해방 후에 태어난 한글세대로서 한글전용론자이지만, 기본한자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계승하려면 한자의 해독과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사어(死語)인 라틴어를 가르치고, 대학에서도 석박사 학위논문을 제출하려면 라틴어를 해야 한다. 서양문화의 원류가 라틴어이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영어 단어 외우는 노력의 백분의 일만 들여도 기본한자 습득은 가능한 일이다.

요즘 대학원의 역사와 문학 분야에서 고대사와 중세사, 고전문학 전공자는 없고, 현대사, 현대문학 전공자만 나오는 것은 젊은 세대가 한자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독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서울대학교 독문과의 한 학년 학생 수가 교수 수보다 적다는 사실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독문학 전공자의 맥이 끊기는 것보다는 전통문화와 국학 연구자의 맥이 끊기는 것이 더 심각하고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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