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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것 /제정임

거짓말쟁이들이 훈계하는 현실…아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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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2-08 20:45:17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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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5일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버럭'하는 반응들이 나왔다. 한 인터넷 신문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왜 내가 당신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당신 자녀들과 자신에게 해야 하는 소리 아닌가?"

이 전 회장이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쇼(CES)에서 "사회 각 부문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발끈'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이 전 회장 자신'이라는 반응이었다. 우리나라 최대기업의 대주주이자 경제계 원로가 '지당한 말씀'을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렇게 '군소리'가 터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삼성 X파일, 비자금, 차명계좌, 탈세, 편법 경영승계의 스캔들과 유죄확정 판결, 그리고 특별사면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충격적인 범죄 혐의가 드러나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은퇴 선언을 했던 이 전 회장이 사면되기 무섭게 국민을 향해 훈계를 하는 모습은 썩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젠 좋든 싫든 그가 경영 무대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국민을 향해 더 많은 '쓴소리'를 날리는 모습을 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다른 기업인들의 사례를 볼 때 그렇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경우를 보자. 박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정부와 노조 등을 거침없이 비판해 '미스터 쓴소리'로 불린 인물이다. 그러나 2005년 회사 돈 286억 원을 횡령하고 2800여억 원을 분식 회계한 혐의 등이 드러나 유구무언의 처지가 됐다. 두산그룹 회장직과 상의회장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희 전 회장과 마찬가지로 구속되지 않은 채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유죄가 인정됐지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실형을 면한 것도 같았다. 이른바 '재벌 정찰제 형량'이었다. 확정판결이 난 후 '올림픽 유치'를 명분으로 초고속 사면된 과정도 거의 비슷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이었던 박 회장에 대해 재계와 체육계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을 위해 사면해 달라'고 호소했고, 정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박 회장은 당시 언론인터뷰를 통해 "다른 욕심은 다 버렸고, 올림픽 유치를 위해 봉사할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사면된 지 한 달여 만에 경영에 복귀했다. 평창 올림픽은? 다 아는 것처럼 유치에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지금 중앙대 재단 이사장을 겸하면서 '대학 개혁'의 칼날까지 휘두르고 있다.

아무리 봐도 훈계 혹은 개혁의 '대상'인 것 같은데 오히려 칼자루를 잡은 인사들이 경제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종시를 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수십 번이나 '원안 추진'을 공약했지만 최근에 이를 뒤집었다. 당시엔 '표' 때문에 소신과 다른 약속을 했다는 얘기였다. 장관급인 권태신 총리실장은 깜짝 놀랄 고백을 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관으로서 세종시 법안을 만들 때는 '청사를 이전할 때쯤 나는 더 이상 공무원을 안 할 테니…'하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그러나 이제는 '그대로 추진할 경우 나라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수정안 추진의 총대를 멨다고 한다. 여야 합의로 만든 법, 즉 제도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면서도 여전히 말로는 '법치'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표를 얻기 위해, 혹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회계서류를 조작하거나 세금을 떼먹거나 거짓 약속과 기회주의적 처신을 서슴지 않던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 '개혁' '법치' '신뢰'를 훈계하는 모습은 현기증을 일으킨다. 우리 사회에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인식이 유달리 뿌리 깊은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이 권력과 돈을 장악하고, 아무리 잘못해도 단죄되지 않는 모습을 국민들이 거듭 봐왔기 때문 아니던가. 감시견(watchdog)이 돼야할 언론마저 매섭게 짖는 대신, '광고주 재벌에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과 근심이 더욱 깊어진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는 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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