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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흥의 문화, 공명의 유전자 /박희봉

월드컵의 선물 승리 그 이상의 것

열정의 불꽃 지필 지도자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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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적인 밤이었다. 광장과 운동장, 거리 곳곳은 거대한 함성의 웅덩이였다. 식당에서, 호프집에서 그리고 가정, 가정마다 모든 국민이 월드컵에 달뜬 밤이었다. 그리스와의 경기 초반 골이 터지자 함성은 뇌성으로 변했다. 다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춤을 추며 하나가 됐다. 300곳에 가까운 거리응원으로 2002년이 되살아날 기세다. 어디, 반도의 남쪽뿐이겠는가. 미국과 브라질,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촌 곳곳에서 한국인들의 함성은 울려퍼졌다.

도대체 월드컵이 뭐기에 한민족은 이리도 열광하는가. 공 하나가 온 나라와 세계 곳곳에 흩어진 동포들을 한데 묶고 있으니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다. 첫 승을 거둔 그 밤,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피를 실감한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응원 문화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을 집단최면에 빠지게 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일제는 식민지 시절 '한의 문화'를 주입했지만 지금 보면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 유달리 외침이 잦았고 시조나 가사, 판소리 등에서 애절한 곡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 이건 물 위로 드러난 얼음을 전부라고 우기는 것처럼 어리석다. 물 속에 잠긴 거대한 얼음덩이는 흥의 문화, 곧 열정이다. 마당놀이, 탈춤, 판소리 등 우리 민속의 정수는 애수가 아니라 풍자와 해학에 있다. 간난을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풍류를 잃지 않았다.

양반을 조롱거리로 삼는 것은 늘 열린 공간에서였다. 닫힌 공간에서 이뤄지는 서양의 악극이나 일본의 가부키 등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는 유달리 흥(興)이 많은 우리 민족의 유전자적 자질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당과 들, 산에서 이뤄지는 갖가지 놀음들은 상하를 파하고, 격식을 깨뜨리는 특이한 문화향유 방식이었다. 배우의 대사에 관객은 추임새로 화답하고 흥이 나면 너나 없이 걸판지게 한바탕 놀음을 하는 게 우리의 문화였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공명(共鳴)의 문화'는 이런 흥의 문화를 가능케 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음을 공유함으로써 동일한 파장을 만들어낸다. 이는 곧 '우리'라는 공동체적 신명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공동체 문화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다. 위기 때마다 '모두를 위한 하나'가 되니 공간적인 간격마저 무색해진다. 이런 일들은 한민족의 공명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잇는 이런 공명의식은 현대과학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그의 저서 '사회적 지능'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단한 공명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말뿐만 아니라 조그만 동작, 미세한 표정의 변화까지도 인간은 순식간에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은 주변에 파장을 전달하며 이 파장이 공감을 형성하면 공명은 더욱 강화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한민족은 유달리 공명을 이루는 장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요즘의 행동양태를 보면 타고난 유전적 기질에 획득형질이 더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화론에서는 돌연변이만 유전된다고 규정했지만 현대과학은 당대의 획득형질이 여러 대를 거쳐 이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유전자는 그 모양도 중요하지만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는가가 전혀 다른 행동양태를 빚는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어떤 이는 인간의 두뇌는 평등하며 다만, 그 발현 정도가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러든 저러든 2002년의 그 전율적인 거리응원은 앞으로도 지속될 게 분명하다. 이번 월드컵이 이런 역할을 강화할 수도 있다. 월드컵이 우리에게 안겨준 귀중한 선물은 승리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근본을 확인하고 이를 드러냄으로써 자기확신을 강화하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물론 아쉬운 점은 남는다. 흥의 문화, 공명의 문화가 유독 월드컵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점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는 왜 열정적이고 강력한 이런 정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스포츠에서 가능한 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불가능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누가 한국인의 유전자 스위치를 켜느냐만 남게 된다. 스위치를 올릴 지도자가 어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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