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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스펙, 그리고 공정한 사회 /조현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 보장하는 사회가 돼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28 20:14:39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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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스펙'이라는 단어가 취업준비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더니 지금은 거의 일상용어가 되어 버린 듯하다. 스펙은 원래 시방서나 설계요구사항, 또는 제품 사양서를 뜻하는 단어(specification)였으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점, 영어성적, 자격증, 각종 수상경험 등 개인경력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개인이 가진 유, 무형의 모든 실력과 재산, 배경을 일컫게 되었다.

학생들의 취업지도를 하다 보면 안쓰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자신의 일생 중에서 제일 예쁘고 화려하게 보내야 할 대학생 시기에 그들은 각종 영어시험을 비롯하여 해외 연수, 봉사활동 등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애써도 일정 점수 위로는 올라가지 않는 영어성적, 어려운 집안 눈치 보며 연수비용 마련하기 등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또 딱한 것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심층면접과 토론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어느 기업체에서는 지원자들끼리 토론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장 '우수한 인재'를 뽑는다고 한다. 칼만 없지, 검투사와 다름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체는 분명 음울하고 가학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회사이리라.

어쨌든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신의 스펙이 마련된다. 즉, 이러한 스펙은 자력적 스펙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스펙이 뛰어나던, 그렇지 못하던 그것은 당사자가 생산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스펙에는 또 다른 종류가 있다. 태어날 때 은수저를 물었는지 아니면 나무 수저를 물었는지에 따라 스펙이 달라진다. 성장기의 환경에 따라서도 스펙이 달라진다. 심지어는 다 자라 결혼을 하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부모의 재산과 지위에 따라 혼인 시장에서의 스펙에 차이가 난다. 이러한 종류의 스펙은 자력적 스펙과는 달리 외부적 스펙이요, 후광적 스펙이다. 뭐, 더 이상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쉬운 말로 하자. 부모 잘 만난 덕이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후광적 스펙을 부러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난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가진 스펙의 일부로 인정을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그 스펙의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의 여부이다. 이것은 곧 요즈음 유행이 되고 있는 공정한 사회와 연결된다. 얼마 전 외교부 장관의 퇴임을 가져온 사건 때문인지 온 사회가 요란하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 또는 식자층이라는 사람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 대해 한마디씩 언급하고 있다. '격조 높은 철학적 배경', '자유주의적 평등', '법치주의가 근간을 이루는 사회' 등등 백가쟁명식 개념 정의가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심지어는 '지속적 발전을 위한 부패문화의 척결' 이라는 거창한 문구도 보이고 있다. 칸트가 등장하고 존 롤스라는 사회학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공정한 기회를 갈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식자층과 권력층이 자신들의 현학을 뽐내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현학적 해석과 설명은 필요 없다. 존 롤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수년 전부터 유행어가 된 '지속가능'의 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공정한 사회를 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다. 곧 '염치를 아는 사회, 꼼수가 없는 사회'이다.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제자들아.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소위 스펙이란 것에 짓눌린 채 방황하는 너희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구나.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의 공정치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너희들은 회의감마저 들 테지. 그 지독히 어두운 불확실성의 안갯속에서 자신이 애써 만든 스펙조차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하겠지. 나도 당장은 너희들에게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제자들아, 그 알량한 스펙이 어떻게 너희들의 따뜻한 성품과 밝은 웃음을 담아낼 수 있겠니. 너희들의 생활에 대한 성실함, 남을 배려하는 큰 마음,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긍정적 태도들은 스펙의 영악스러운 내용보다 훨씬 중요하고 큰 재산이란다.

그리고 너희들이 노력한 만큼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는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꾸나.

인제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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