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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지리산의 작은 잔치 /박남준

새 시집 뒷일 미루고 동네밴드 공연 연습

스스로 문화 만들며 가을 보내는 '악양'

올해도 돼지 잡고 흥겹게 술잔 돌릴 터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29 20:43:14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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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별빛이 시리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배추는 그런대로 제법 자라서 속이 차기 시작했는데 늦게 심은 무는 이제 겨우 굵기가 아기 팔목 정도나 될까. 무야~ 무야~ 절구통만큼은 바라지 않지만 언제 내 다리통만큼 굵어져서 동치미를 담을 수 있겠냐. 텃밭을 살펴보며 중얼거린다.

바쁘다. 아침햇볕이 마당 가득 들었다. 간밤에 내린 서리를 맞고 호박넝쿨이 축 시들어 푸른빛을 잃었다. 거무스레 변해간다. 불쑥불쑥 정신없이 열리던 애호박도 파장이구나.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양파와 다진 마늘을 곁들여서 붉은 고추로 고명을 얹은 가으내 냄새가 풀풀 나도록 해먹던 애호박찜도 내년을 기약해야겠다. 줄기줄기 매달린 자투리 어린 호박들을 따서 썰고 채반에 말린다. 고실고실 말린 애호박고지는 살아오며 이런저런 신세를 졌던 이집 저집 도시에 사는 지인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어찌 이걸 혼자 다 먹겠다고 만들고 있겠는가.

문득 초가을쯤 서산 부석사 산사음악회에 시낭송을 하러가다가 보았던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눈에 밟혀온다. 알알이 벼들이 익어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금빛 풍경이 아니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바닷물에 침수되었던 벼들이 벌겋게 타 죽어버린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곳곳에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었으며 시설재배 농경지들이 폐허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자동응답기에 담아놓은 가을걷이 잘하라는 말이 마음에 턱 걸린다.

정말이지 바쁘다. 며칠째 겨울 땔나무를 마련해서 잔뜩 마당에 부려만 놓고 부엌으로 옮겨 쌓아놓지 못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엊그제 5년 만에 낸 여섯 번째 새 시집이 나왔는데 출판사에도 가지 못했다. 문우들이나 지인들에게 서명을 해서 보내고 이런저런 볼일들이 있는데 도무지 몸을 뺄 틈이 없다.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한 가지가 시집을 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시집 나왔는데도 그 뒷일을 하러 서울에 갈 시간이 없다니. 흐유- 하고 탄식이 뒤따른다. 이것들 다 동네밴드 때문이다.

3년 전에 마을의 늙은 청년들과 모의를 한 끝에 만든 밴드의 정기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이라면 이미 두 번의 정기공연을 한 경험이 있으니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문제는 이번 공연의 거의 모든 곡이 밴드단원들의 모진 산고를 겪은 작사, 작곡으로 꾸며진 첫 무대라는 점이다. 물론 작곡 능력이 뛰어나서 곡들을 만든 것이 아니다. 두 번의 공연을 마치고 내린 평가회에서 앞으로도 이런 카피 곡으로 내용이 꾸며진다면 밴드를 지속해야 할 별 의미가 없으니 뭔가 특단의 조치를 모색해야한다는 반 강제적 외압으로 인해 창작곡 중심의 공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작곡가를 갖은 압력과 통사정을 해서 모시고 지도를 받으며 직접 작사한 노랫말들을 읽어보니 구구절절 자신의 삶이 묻어 있는 내용들이어서 뭉클해지기도 했다. 여성보컬을 뺀 다른 단원들은 연주자들이니까 할 수 있다지만 악보를 그릴 줄도, 볼 줄도 모르는 내가 2곡이나 작곡을 하기까지 얼마나 전전긍긍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겠는가. 더군다나 작곡을 한 사람이 노래도 직접 불러야 한다니 오 이런 맙소사!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이라는 하동지역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동네밴드 공연은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마을잔치 한마당이며 농산물 직거래장터 등을 열어 조금이나마 지역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마련한 것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돼지를 잡고 떡과 막걸리 잔이 흥겹게 돌려질 것이다. 물론 달랑 동네밴드 공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만든 '필통' 기타반의 연주시간,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이뤄진 밴드 '구멍 난 양말'의 공연, 진도북춤, 악양 농악단의 길놀이 풍물 판, 추억의 튀밥장수아저씨 등이 악양면 매계리에 있는 하동학생야영수련원에서 11월 13일 오후 2시부터 이어질 것이다.

키 작은 돌담 너머 주렁주렁 대봉 감들이 붉은 꽃등 불을 피워 올리며 가을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여기는 악양, 악양에서 당신께 소식을 띄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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