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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정찬주

이호중 화백이 남긴 내 선친·어머니의 초상화 달리 보여

마치 친동생 같았던 그의 명복을 빈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1-19 20:59:21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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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침햇살이 산을 넘어오는 오전 9시쯤에 산방을 나선다. 산책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이다. 밤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낙엽이 뒹구는 소리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곡이라도 여러 번 들으면 귀가 지치지만 파도소리와 흡사한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귀를 더 기울이게 한다.

그런데 이제는 낙엽 뒹구는 소리가 내 가슴을 한없이 어둡고 무겁게 한다. 뜰에 떨어져 있는 낙엽만 봐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발자국처럼 나를 허전하게 만든다. 지금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 지인은 유명을 달리한 화가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그를 천재화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젊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내가 사는 시골 간이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갔다가 익산역에서 KTX열차로 환승하여 서울로 가는 동안 내내 후배인 그 화가가 떠오르곤 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삽화청탁을 하는 등의 도움을 주는 처지였다. 샘터사에 다닐 때 이미 고인이 된 최쌍중 화백의 추천을 받아 알게 된 그는 무명화가나 다름없었다. 몇 년이 흐른 뒤 그는 만학도로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어느 날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사연인즉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는데, 비행기표 값이 없다는 것이었다. 비행기표 값이 없다는 것은 당장 생활비도 여의치 않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내 월급 중에 3분의 2 정도를 가불하여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나를 찾아와서는 예술철학 졸업시험을 구두로 보는데, '사실주의를 말하라'는 질문을 받고 당시 내가 연재하던 성철스님의 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이 생각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답변하여 여러 명의 러시아 교수들을 놀라게 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형의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지갑에 넣고 다니던,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부친 사진을 꺼내며 "그렇다면 초상화나 그려주지 그래" 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 초상화뿐만 아니라 몇 년 뒤에는 올해 83세이신 어머니 초상화까지 그려 내게 선물하는 의리를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그림이 어찌나 사실적이던지 지금도 나와 함께 하는 것 같은 행복감과 안도감을 준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자 그에게는 최고의 명작이 아닐까 싶다.

서울에 도착하여 서둘러 병원으로 가 문상했는데, 이제 겨우 중 3인 그의 외아들을 보자마자 영정 속의 그가 야속했다. 영정은 그가 그림을 그릴 때 편하게 입곤 했던 티셔츠 차림이었고,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와 냉소가 어려 있었다. 부인은 건강진단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게 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20여 일 전에 간암말기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회한이 사무칠 만도 했다. 그와 함께 '형제전'을 연 적이 있는 형은 동생의 천재성 속에서 비극을 읽었다. 이미 이삼십 대에 천재화가라는 평을 들었으니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그 이후의 세월이 얼마나 괴로웠겠느냐는 진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사가는 고객을 탓하기도 했다. 고객이 부르는 밤의 술자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어울리다가 간이 상했을 거라는 원망이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둘째 딸아이도 아저씨가 불쌍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아이가 중학생일 때 그의 화실을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딸아이도 '나도 아저씨처럼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장래진로를 예술 쪽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산책을 다른 날보다 일찍 마치고 산방에 돌아오니 거실에 걸린 선친과 어머니의 초상화가 여느 날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금언이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내 산방을 찾아온 손님들이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왜 찬탄했는지 이해가 된다. 친동생 같았던 이호중 화백의 명복을 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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