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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말이 기억하는 풍경 /강영조

전국 물가 산자락, 패이고 잘려나가 아름다운 땅 물고기 사라지는 만큼

우리 풍경 표현하는 모국어도 야위어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1-24 20:59:16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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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백색광선을 분광기에 통과시키자 아름다운 색깔로 변했다. 이 광경을 제일 처음 본 사람은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다. 1666년의 일이다. 뉴턴이 본 이 색의 띠를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보라색에서 붉은 색에 이르기까지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의 색이다. 이 색을 프리즘과 같은 도구를 빌리지 않고 한 눈에 볼 수 있을 때가 있다. 비가 개인 후 먼 하늘 위에 무지개가 피어오를 때가 그렇다.

무지개가 일곱 색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배워서 누구나 알고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초등학교 때 이렇게 소리 내서 외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무지개를 일곱 색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에는 무지개를 구성하는 색 이름이 여섯이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바싸어에는 무지개 색이 hul, ziza 두 가지 뿐이다. 바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 두 색으로 비가 개인 후 사막 저 멀리 물기 머금은 하늘 위에 피어오른 무지개를 그릴 것이다.

벤자민 워프는 우리 눈앞의 세계는 만화경(萬華鏡)과 같이 막연하므로 그 자체로는 지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언어 체계,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모국어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하여 만들어진 세계인 셈이다. 언어가 세계 지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인지과학자들의 실험으로도 검증되고 있다. 물론 세계 지각의 하나인 풍경의 체험도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언어력에 따라 그 심도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와 같이 몬순 풍토에서 특히 비는 주력 산업인 농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는 유독 비를 가리키는 말이 많다. '가랑비, 가을비, 구름비, 꽃비, 달비, 는개, 모종비, 목비, 발비, 밤비, 보슬비, 몸비, 산비, 소나기, 억수, 장마, 찬비'. 박용수의 '우리말 갈래사전'에 올라있는 비를 찾아보니 이렇게 많다. 이처럼 많은 단어로 비를 구분하는 우리는 강우 현상을 '비'라는 단어 하나만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낙타를 24가지의 단어로 구분하는 아랍 유목민이나 진흙땅을 구분하는 단어를 200가지 이상 가지고 있는 아마존 밀림 속에 사는 사람들과도 우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

'가라, 가래, 가러, 가로, 가리, 까래, 각시피리, 각씨피리, 간다리, 갈갈기, 갈대, 갈래, 갈래기, 갈로, 갈어, 깔피리, 갈피리, 개피리, 꼬갈, 꽃깔치, 꽃피리, 과래, 광대, 금피라미, 돌가래, 먹지, 부로치, 불가로, 비단피리, 술매기, 적도치, 홍가리, 갯피리, 갱피리, 파라지, 날피리, 은피리, 지우리, 참피리, 피라지, 피래미, 피랭이, 피리'.

개울가에서 자란 독자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피라미의 수컷인 불거지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민물어류학자 최기철은 전국을 샅샅이 뒤져 피라미를 가리키는 말을 500종 이상 수집했다. 피라미를 가리키는 방언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 물고기가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관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미국의 도시설계가 케빈 린치는 아프리카의 마사이 족이 마을을 이주할 때 그 전까지 살던 곳에서 사용하던 지명을 새로운 땅에 명명하는 사실을 들먹이며,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환경은 집단을 결속시키는 공통의 추억이라든가 상징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때 풍경은 집단의 역사라든가 이상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기억법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전국에서 마을 앞을 흐르던 아름다운 물가와 그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던 산자락들이 패이고 잘려나가고 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규격화한 물길과 곧게 뻗은 넓은 도로가 차지하고 있다. 풍경이 바뀌면서 계절에 따라 다른 말로 불리고, 지방에 따라 다른 억양의 사투리로 가리키던 풍요로운 땅들과 물고기들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간 무지개를 두 가지의 언어로 부르는 바싸어처럼 한국어도 단순해지는 것을 아닐까하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풍경을 가리키는 모국어가 야위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풍경의 기억, 그 풍경이 하나로 묶어주던 우리들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동아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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