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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우리가 한 일은 '정의'가 아니라 '수치'였다 /조현

여당 원내대표는 예산안 파행처리를 '창피스러운 일' 이라고 말했어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2-20 20:59:35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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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끝나간다. 곧 국내외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올해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중요도 순으로 정리하여 발표할 것이다. 이러한 언론계의 연례행사는 우리의 짧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역사의 단편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고만고만한 소위 지식인 집단들은 새해를 표현하는 멋들어진 사자성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을 터이다.

한 해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상기하는 것도, 올해의 사자성어를 음미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문화적, 사회적 키워드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키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치관, 우리 국민이 하루하루 겪고 있는 일상 생활의 정서, 그리고 앞으로의 지향점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의 키워드 중 단연 1위는 '정의'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상반기에 마이클 샌델이라는 사람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발간됐다. 곧이어 이 책에서 힌트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부의 한 인사가 현 정부의 정치철학으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뒤 이 단어는 가히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죽은 지 오래된 사회학자가 관 속에서 나와 소개되고 대통령을 위시한 많은 정치가들이 정의에 대해 일가견을 피력했으며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어떻게 좀 더 어렵게 설명할 수 없을까 고민했으며 나 같은 일반인들은 혹시 유행에 뒤처지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걱정스러워 샌델의 책을 구입했다. 드디어 판매순위 1위 작가가 된 저자는 한국을 방문해 특별강연을 가졌으며 정의에 관심이 많은 우리 국민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행은 수명이 짧은 법. 가을바람에 모기 사라지듯 한순간에 그 요란한 정의 타령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국격이란 단어가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했다. 참고로 국격이란 아직 우리말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나라의 품격과 수준을 뜻하는 것이리라. G20 회장국으로서의 국격, 새로운 선진국으로서의 국격 등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나는 키워드였으나 G20 회의 종결과 동시에 이 역시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역시 유행은 반복되는 법. 우리는 정의라는 단어를 연말에 또 다시 듣게 됐다. 내년도 예산이 국회에서 아름답지 않게, 아니 추하게 여당 단독 표결에 의해 통과된 뒤 여당 원내대표는 '우리가 한 일은 정의였다' 라고 말했다. 많이 듣던 단어였다. 우리 국민은 지난 1년간 정의에 대해 엄청난 공부를 한 바 있다. 그런데 국회에서의 예산안 파행 처리가 정의라고 하니 지금까지 우리는 헛공부를 했나보다.

인간 생활에 있어 그 한계를 벗어나면 대응하기 어려운 재난을 가져오는 위험성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권력, 재물, 그리고 말이다. 특히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 또는 말의 중요성은 본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이 국사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국민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국민 역시 정치가의 말을 통해 그와 그의 소속당을 판단하며 그를 외면할지 또는 희망을 기대할지 결정하게 된다. 불 탄 보온병을 탄피로 착각하는 정도의 발언은 한심하기는 하지만 '쯧쯧'하고 혀를 차며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독선과 오만으로 찬 '정의'스러운 발언은 그렇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그 말에는 국민에 대한 무시가 담겨져 있으며 의회제도에 대한 경멸을 엿볼 수 있다.

스웨덴의 유명 정치가 악셀 옥센 세르나는 아들에게 남긴 유언장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 중에 하찮은 인간이 많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이 말을 부정하고 싶다. 왜냐고? 우리의 자존심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을 그러한 수준의 부류에게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미래에 암운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치가는 일반 국민에 비할 바 없이 완벽하고 유능하며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때문에 여당 원내 대표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우리가 한 일은 정말 창피스러운 일입니다. 사회 정의와 의회 정의에 반하는 일을 했으며 국민들에게 실망을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바랍니다."

인제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보건과학정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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