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되어있는 한국사가 내년부터는 필수과목으로 지정된다고 한다. 개정 교육과정이 올해부터 시행되어 고교 전 과정이 선택교육과정으로 전환되면서 원래 고1 공통필수 과목이던 한국사도 예외 없이 선택과목이 될 상황이었다. 초등학교에서도 6학년 사회 교육과정에 있던 역사교육 부분이 올해부터 5학년으로 내려가게 되어 여타 부분들과의 시수 조정 문제로 역사수업 결손이 염려되던 터였다. 들끓는 비판 여론에 정부와 여당이 발 빠르게 나섰다. 여타의 현안에서는 국민의 여론에 별로 개의치 않던 정부가 이처럼 전향적으로 나오는 것도 그렇고 한때 껄끄럽던 여당과도 손발을 착착 맞추어가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정부와 여당의 신속한 움직임도 그렇지만 더욱더 눈길을 끄는 것은 소위 보수 진영의 한국사교육강화론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 진영은 역사에 있어서 항상 이중적인 잣대를 사용해왔다. 북한을 논할 때는 '감상적 민족주의'를 버려야한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직면해서는 민족주의에 호소한다.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를 문제 삼는 것은 '자학사관'이라고 폄훼하면서도, 민족의 과오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고 처음 이름 붙였던 일본 우익의 태도는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수 진영의 논조가 실로 단호해 보인다.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처럼 자국의 역사를 기피하고 홀대하는가?" "국가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선 한국사 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 등등 나름 진지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의견은 우리 국민의 정서적 혈관을 건드리는 측면이 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확고한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과 단결을 위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를 얻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그 '우리'가 폐쇄된 공동체여서는 곤란하다. 굳이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는 본래부터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있었다. 예컨대 불교와 유교만 해도 외래의 기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정착되어서도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계층 및 분파들에게 상이하게 받아들여지고 실행되어왔다. 따라서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라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리'와는 다른 상황에 처했던 다양한 '인간'의 풍부한 경험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우리의 좁은 세계를 확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기존의 한국사 교육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를 넓히기보다는 좁힌다는 데 있다. 이 땅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겪은 고통과 기쁨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인간적 감수성과 만나지 못하고 그저 자민족에 대한 자화자찬에 그친다면 그런 교육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중국을 보라. 머나먼 과거사에까지 무소불위의 패권을 주장하는 동북공정과 인(仁)의 정신과는 한참 거리가 먼 국수주의적 '공자 부활' 현상은 과연 어떠한가. 아니면 일본 우익들처럼 자국민과 타국민 모두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전쟁을 '백인종 식민지 지배에 대항한 해방전쟁'으로 호도하는 그들 식의 '자유주의 사관'은 또한 얼마나 소아병적인가. 이들과 비교해볼 때, "한국사,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한국의 산업화 경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5·16과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전 세계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현대사 지식을 갖추는 게 글로벌 경쟁력"이라고 역설하는 한국의 보수언론은 과연 얼마나 나아 보이나? 이러한 식이라면 설령 한국사교육 대신 세계사 교육의 강화를 내세운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아는 것이 기껏해야 세계 앞에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위대한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실리를 얻지도 그렇다고 남달리 똑똑해지지도 않지만 적어도 인간적으로 성숙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소아병을 키우는 역사교육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편이 옳다.
부산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