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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철사 아빠 헝겊 아빠 /김철권

돈 잘 버는 철사아빠 좋다고 해놓고, 싸우고 공격할땐 헝겊아빠 찾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3-21 21:11:36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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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이 진료실에 들어온다. 정장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초췌하고 며칠째 잠을 설친 듯 두 눈이 충혈되어 있다. 남자는 주저하다가 말문을 연다. 대학생인 딸과 말다툼을 하다가 딸로부터 "아빠가 지금까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을 들은 후로 사는 게 허무하고 잠도 오지 않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이 아내도 이전에 나와 싸우면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그때는 화가 나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에 딸애로부터도 그런 말을 들으니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울고 싶어도 마음껏 울 수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표를 내고 싶은 순간이 수백 번도 넘었지만, 나 하나 참으면 집안이 평온하다는 생각에 꾹꾹 참으며 살아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싶어도 그 돈을 아끼면 얼만데, 술을 마셔도 안주를 시키면 얼만데, 늘 돈에 시달리면서도 그래도 아비가 해야 할 일이 처자식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56년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마음 편하게 논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굶기지 않으려고, 공부시키려고. 그런데 해준 게 하나도 없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남자는 말하다가 끝내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나는 이 땅에서 아버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다. 그리고 해리 할로우(Harry Harlow)의 어미 원숭이를 떠올렸다.

해리 할로우는 두 마리의 인조 어미 원숭이 모형을 만들어 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였다. 한 어미는 철사로 만들어 딱딱하지만 유방 앞 젖꼭지에서 젖이 나오는 철사모형이고, 다른 어미는 헝겊을 입혀 푹신하고 부드럽지만 젖이 나오지 않는 헝겊모형이다. 새끼 원숭이는 처음에는 젖을 주는 철사 어미에게 매달려 젖을 먹지만 곧 헝겊으로 만든 푹신푹신한 헝겊어미로 옮겨와 매달려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새끼 원숭이를 중립적인 위치에 놓고 갑자기 놀래주면 원숭이는 쏜살같이 헝겊 어미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곤 했다. 그리고 헝겊 어미가 곁에 있을 때는 자신감 있게 주변을 탐색하지만, 헝겊 어미가 옆에 없을 때는 새끼 원숭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해리 할로우는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차가운 철사 어미보다는 비록 젖을 주지는 못해도 안아주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주는 헝겊 어미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새끼 원숭이에게 어미의 역할이란 단지 먹이를 주는 것보다는, 위협을 느끼면 언제라도 숨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안전기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먹을 것을 구하느라 자식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던, 그래서 자식들에게 항상 차가운 존재로 기억되는 남자. 젖만 주는 철사 어미 원숭이같이 돈만 벌어다주는 기계 같은 남자.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식들에게 철사 아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험을 떠나 현실로 돌아오면 양상은 달라진다. 진료실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틈나는 대로 물어본다. 차갑지만 돈을 잘 버는 철사 아빠가 좋아, 아니면 따뜻하지만 돈을 잘 벌지 못하는 헝겊 아빠가 좋아? 대부분의 자녀들은 철사 아빠가 더 좋다고 대답한다. 차갑지만 돈을 잘 버는 철사 남편이 좋아요, 아니면 따뜻하지만 돈을 잘 벌지 못하는 헝겊 남편이 좋아요? 대부분의 아내들도 철사 남편이 더 좋다고 답한다. 그래놓고 싸울 때만, 아빠나 남편을 공격할 때만, 헝겊 아빠가 더 좋고 헝겊 남편이 더 좋다고 한다.

이 시대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자녀의 아버지로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내 자신 생각이 많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남자에게 도움 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역할이 돈만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며, 정서적으로 공감해야 한다며 교과서적으로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살아 온 그 남자의 삶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눈물 닦으라며 책상 위에 놓인 티슈만 부지런히 건네주었다.

동아대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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