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고 처마 끝 작은 나무의자에 앉는다. 빨래들이 너울거리며 바람의 춤을 춘다. 마당엔 붉은 며느리주머니꽃이 절정을 이루고 배꽃과 개복숭아꽃잎이 나풀거리며 이승을 건너는 꽃 그늘 아래 이제 막 한 송이, 두 송이 꽃을 피우고 있는 보랏빛 하늘 매발톱꽃 바라보며 참 곱기도 하다고 중얼거린다.
모란꽃 봉오리가 온통 몸이 간지러운가 보구나. 검붉은 자줏빛 속살을 슬쩍 내보이고 있다. 고요하다. 한 송이 꽃잎이 열릴 때 누군가는 우주가 흔들린다고 하지만 저 고요함 속에 한 꽃이 지고 한 꽃이 핀다.
섬진강에 나간다. 내가 오토바이크라 부르는 49.5㏄ 노랑 스쿠터를 타고 강으로 이르는 길가, 악양 들녘의 밀밭엔 벌써 밀들이 패어 고개를 내밀고 찰랑거리는 푸른 물결로 손짓하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잠시 내려 바람결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밀밭 길을 걷는다.
벚꽃이 진 섬진강가 차마 눈부셔 마주 눈을 뜨기 어려운 금모래, 은모래 밭을 가르며 푸른 섬진강물이 흐른다. 강가에 갯버들과 왕버드나무와 팽나무들 어린 연둣빛이 반짝인다. 강둑을 따라 걷는다. 제비꽃과 민들레꽃과 들현호색꽃들 저마다의 빛깔로 봄날을 노래한다.
남한강의 봄날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영산강과 금강과 낙동강의 풍경도 이러했을 것이다. 찬란한 섬진강의 봄날을 걷다가 갑자기 힘이 빠지고 속이 상한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니 울화가 치민다.
3년 전 이맘때쯤 한강과 낙동강과 영산강과 금강을 걷던 발걸음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산란에 필요한 모래와 조약돌들이 없어진 강에 겨우겨우 살아남은 물고기들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단양쑥부쟁이 군락지도,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던 습지들도 사라진 4대 강 죽이기 사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깃발을 치켜들고 국민을 현혹하는 자들, 피땀 어린 세금을 악용하며 착복하고 있는 현 정권의 수뇌부와 그에 편승한 모리배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친수법이라는 것도 결국 그와 같은 일들을 마음 놓고 벌이기 위해 만들고 있는 이중, 삼중, 눈 가리고 아웅~ 법이지 않는가. 막무가내, 우격다짐, 불도저식으로 강행군하는 공사장에서는 사업에 투입된 현장 노동자의 사망자수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11명째, 그리고 지금까지 20명이나 된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어디 죽음과 재앙으로 치달리고 있는 4대 강 죽이기사업뿐인가.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의 원전사고가 일으키고 있는 방사능의 심각한 사태를 눈에 훤히 보고 있는데도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수명이 다 된 고리원전 1호기를 계속 연장해서 쓰고 있다니, 도대체 안전 불감증이다.
뻔뻔한 이 정권은 도대체 국민알기를 뭘로 보고 있는가. 국민복지나 권익은 바라지도 않는다. 생명이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쁜 이 행복을 빼앗아 가지나 말아달라는 것이다. 제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두렵다. 아니 끔찍하다. 얼마 전 알고 지내는 한 스님으로부터 향기로운 문자를 받았다. 산중에 계시다가 어찌어찌하여 도심 속에 나가 일을 하고 있으나 그 마음에 심지를 잃지 않고 청정함을 지키고 있으니 이런 보배로운 귀를 얻으셨구나.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젊은 시절에는 산중의 고요함에 취하여 산빛 물소리에서 옛 경전을 읽었지. 이제는 바람 불고 먼지 날리는 세월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선 이 자리, 나는 사람의 얼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대방광불 화엄경을 읽고 있느니 맑은 바람 드는 새벽 뜨락의 대숲 바람소리 듣노라."
나는 이 정권의 얼굴들에게서 무지몽매를 읽는다. 탐욕을 읽는다. 재앙을 읽고 죽음을 읽는다. 법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무엇하고 있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날 섬진강 길을 걷다가 만나는 들꽃 한 송이, 싱그러운 나무들의 연둣빛이 갑자기 안타깝고 무서워졌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