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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지하철의 즐거움 /박형섭

역으로 가는 길에선 무심했던 주변 풍경, 평범한 사람들도 신선하게 다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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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04-29 21:12:01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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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승용차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지하철을 탄다. 에너지 절약 캠페인에 동참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걷기운동을 하자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매일 하던 조기축구를 중단한 시점이기도 했다. 운동량 부족이 금세 몸무게 증가로 나타났다. 그때 고안해낸 것이 생활 속의 걷기였다. 요즘처럼 날씨가 좋을 때 동네의 산책로를 걷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왕이면 출퇴근 때도 걷기를 실천하기로 작정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도 20분은 잡아야 한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매일 왕복 40여 분을 걷는 셈이다.

지하철을 타고 다녀보니 여러모로 이롭다. 무엇보다도 교통비가 현격히 절감됐다. 자가용보다 3.5배의 경제적 이득이 있다. 그뿐인가.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량을 걸으니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게다가 직접 차를 운전하는 수고와 사고의 위험에서 해방돼 그 시간을 달리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읽기, 음악 감상, 휴식 혹은 수면, 사유하기 등.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다! 차도와 철도는 단순 비교해도 후자가 훨씬 빠르다. 나의 경우, 만약 지하철이 자가용보다 목적지에 이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면 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걷기운동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랴!

지하철 이용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난 지금 장점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집 주변의 인도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에 몰랐거나 무관심했던 세상을 새롭게 발견한다. 계절마다 바뀌는 형형색색의 초목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거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전엔 아파트 화단에 그토록 많은 꽃나무가 있는 줄 몰랐다. 목련, 영산홍, 동백, 철쭉, 라일락, 벚나무 등 일일이 세나가다 보면 금세 이십 가지가 훌쩍 넘는다. 가을철에는 단풍과 뒹구는 낙엽을 쫓는 낭만도 만끽한다. 이때 멋진 색으로 물든 나뭇잎을 추억의 시간을 저장하듯 주워 모으기도 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빛깔이 절기의 순환을 알린다. 아침에 거리에서 마주친 환경미화원들의 미소는 나의 혼탁한 욕망마저 쓸어가는 듯하다.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은 속도를 내고 콧노래는 멈출 줄을 모른다. 머릿속으로는 책의 구절을 되새기기도 하고 시를 암송하기도 한다. 요컨대 집과 역 사이의 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서정적 삶의 공간이 된다.

지하철은 원래 런던에서 처음 개통돼 기술의 승리, 안전과 편리의 상징물로 인식됐고 오늘날에는 대도시의 필수적 교통수단이며 가장 대중적인 시설물로 각인돼 있다. 나에게 지하철은 좀 더 사적으로 각별한 공간이다. 대학에서 문학과 드라마를 가르치는 탓인지 주변의 모든 것이 볼거리요, 풍경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표정, 몸짓 등 모든 게 의미를 산출하는 기호로 보인다. 어떤 경우는 그들의 언행이 개성의 차이를 넘어 학습으로 다가온다. 가령 젊은이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신조어나 새로운 표현의 트렌드를 발견하는 것이다. 최근엔 열차 안에 외국인의 수도 늘고, 서툴지만 그들이 우리말로 소통하는 것도 목격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의 퍼스낼리티를 통해 연극적 몽상에 젖기도 한다.

지하철역 내에는 눈길을 끄는 유익한 정보들이 있다. 문화행사 안내, 영화, 공연, 전시회, 축제 포스터 등이 그렇다. 그 가운데 파리 뉴욕 런던의 지하철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바로 그림을 동반한 시이다. 전차를 기다리며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승객의 이동이 많은 환승역에서는 소규모 전시회와 음악회도 열린다. 언제쯤 부산의 휴메트로가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과 친절, 안전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지구촌 어느 도시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격조 높은 시민적 문화공간이 되기를, 그리고 '모든 길은 지하철로 통한다'는 유행어를 낳을 수 있도록 쾌적한 노선이 증식되기를!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평범한 일상 속의 행복을 되찾은 뿌듯함일까, 스스로 결심하고 약속한 행동의 실천에 따른 성취감일까. 오늘도 나는 즐거운 지하철 산책자의 발걸음을 뗀다.

부산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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