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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인가 /정지창

빈 라덴 사살 암호는 아파치족 '제로니모'…약자의 저항은 언젠가 재평가 된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5-15 20:32:15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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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자기 정당화의 기록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강자는 승리의 영광과 함께 패자와 약자가 가진 일정 부분의 역사적 진실과 정당성까지 독차지하려고 한다. 이럴 때 강자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대방, 즉 패자를 '나쁜 놈'이나 '악마'로 낙인 찍는 것이다.

최근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도 이런 승자독식의 원칙을 어김없이 보여주는 사례였다. 남의 나라 안방에 특공대를 투입하여 9·11 테러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한 비무장 '테러리스트'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하여 시신을 바닷물 속에 수장하고는, 성조기를 흔들며 환호작약하는 미국인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 참사 현장(이른바 그라운드 제로)에 모여 "마침내 정의는 이겼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야말로 승자독식의 냉혹한 현실을 웅변한다. 그것은 마치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인디언)들을 몰아내고 태평양에 도달한 서부 개척자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프론티어 정신'으로 미화하는 미국의 역사교과서를 연상시킨다.

인디언들을 동물처럼 몰아내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땅따먹기를 하던 서부개척자들의 후손 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군사령관이었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다. '서쪽으로 더 많은 땅을!'하고 외치던 서부개척자들의 의지가 이처럼 직설적으로 드러난 이름이 어디 또 있을까. 우리가 아는 서부개척사를 뒤집어 보면 바로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과 목숨을 빼앗는 탐욕과 살육의 역사인 것이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 땅을 먹었다"는 한 인디언 추장의 말은 역사교과서에 기록되지 않은 서부개척사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공식적인 미국의 역사에서 무시되고 매장된 역사적 진실은 디 브라운이라는 재야 역사학자가 각종 기록을 토대로 펴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에 의해 그 일부가 밝혀졌다.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처럼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더 야만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번 작전에서 빈 라덴을 가리키는 암호가 '제로니모'였다는 사실이다. 본명이 고야슬레이이지만 백인들이 붙인 제로니모로 더 잘 알려진 이 아파치족 최후의 추장은 1890년대에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으로 미국 기병대를 괴롭혔다.

정통적인 미국의 역사교과서와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제로니모는 무고한 백인 개척자들을 공격하고 잔혹하게 살해한 야만족 테러리스트로 각인돼 있으므로 미군 당국은 빈 라덴을 같은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보고 '제로니모'로 지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인식은 할리우드의 서부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어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디 브라운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의 뒤를 잇는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인 노암 촘스키 교수는 "만약 이라크 특공대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집에 침투해 부시를 암살하고 그 시신을 대서양에 버렸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우리는 자문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과는 달리, 파키스탄 영내로 미군 특공대가 불법 침입하여 빈 라덴을 처형한 이번 작전이 국제법 위반이며, 재판 없이 그를 사살한 것 역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테러리스트란 무엇인가. 제로니모나 빈 라덴은 생존권을 위협받는 처지에서 상대방인 강자의 횡포로 평화적인 협상이나 외교적 수단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니까 게릴라전이나 자살 폭탄 테러로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고 시도한 약자, 즉 궁지에 몰리자 고양이한테 달려든 쥐가 아닌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상해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투쟁을 한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를 시켜 폭탄 테러로 독립의지를 알렸던 것을 기억한다. 김구 선생이야말로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흉악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약자에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역사적 진실과 정당성은 단기적인 승패에 의해서 승자가 영원히 독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라도 묻혀 있던 사실의 발굴과 더불어 역사적 진실과 정당성은 끊임없이 재평가와 수정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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