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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이론이 교양으로 소비되는 지적 풍토 /이택광

서양이론 맹목말고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11-23 20:08:59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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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외국의 학자에게 한국의 지적 풍토를 설명해주면 흥미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최근 들어 고민하고 있는 연구주제와 일정하게 관계를 가진 것이어서 처음에 재미삼아 시작했다가 진지한 논의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본래 취지나 맥락과 상관없이 이론이 소비되는 현실이다. 탈맥락화라는 말로 설명하면 간단하겠지만, 문제는 현상 진단보다도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현상은 본질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단순하게 해당 현상을 기술하고 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들뢰즈주의자라고 소개한 이가 특정 정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는 경우나, 사르트르를 인생의 멘토라고 생각한다는 이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우파 잡지에 기고를 한다는 사실에서 이런 탈맥락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전에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만난 싱가포르 대학의 학자는 그 동네 역시 비슷하다는 소견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문화연구라는 '좌파학문'을 지원하는 그 싱가포르 정부가 실제로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실행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것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문화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선진국'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선진화 또는 '서구화'를 추진하는 것을 근대화 자체로 받아들인 싱가포르나 한국에서 서구의 이론은 그 맥락과 관계없이 '신문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시아의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서구를 표준으로 삼고 아시아적인 것을 버리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정하게 서구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출되었던 이론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처럼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서구에서 한때 유행했던 철학이나 이론의 경향이 여전히 남아서 '좋았던 시절'을 증언하는 경우를 한국의 대학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은 지엽적이거나 부차적이라기보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하는 문젯거리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짙게 깔려 있는 전제는 바로 서구의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고, 그래서 훨씬 합리적일 것이라는 기대이다. 기술과학의 문제라면 이 같은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이론이나 철학이라고 한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해당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출된 이론을 절대화했을 때 수용자가 개입할 여지는 사라진다. 이론은 절대적인 진리로 객관화되면서 모든 맥락을 초월한 하나의 사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론은 개인을 성숙시키는 '교양'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다. 들뢰즈나 사르트르를 입에 담는 것이 이를테면 고상한 존재감을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대학논술고사에 들뢰즈나 푸코 같은 철학자의 지문이 출제되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렇게 공식적인 입시에 등장할 정도로 서구의 이론은 일반지식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사회변혁의 입장을 대변했던 혁명이론이 교양으로 소비되는 현실은 체 게바라의 경우를 통해 확인된다. 그만큼 이런 이론이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서구를 표준으로 근대화에 매진해왔던 맹목적인 우리의 지적 풍토도 한몫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쟌니 바티모 같은 이탈리아 철학자는 성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서구의 기독교가 인문학의 토양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석은 곧 성서를 일반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을 지칭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시급한 것은 일반지식으로 전락해있는 이론을 급진화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급진화라는 것은 죽어 있는 이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론 자체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만들어낸 상황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고민하는 것이 그 작업이다.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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