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강신 상태에서 무당이 죽은 자를 대신해서 하는 말이다. 그 상태를 벗어나면 무당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한다. 그것이 일반화되어, 원통한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그 불만을 길게 늘여 하소연하는 말이 되니 의미의 확대다. 어떤 뜻으로 쓰이든 선택된 소수의 것이 아니고, 가진 것 없거나 적은 백성의 것이다.
금력과 권력 등속 가진 것 많은 사람은 부정적 언행 따위가 필요없다. 돈과 배경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과묵하고 점잖다. 그런 것들이 없어서 항상 피해자이거나 피해의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백성은 넋두리로나마 스스로의 한(恨)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
전임대통령 한 분은 한풀이란 말을 즐겨 썼는데 오류다. 풀 수 없는 것이기에 한 아니던가. 소월의 진달래꽃 사랑이 곡진한 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평생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가난한 마음이 한이다. 풀 수 있는 한은 이미 한이 아니다. 오히려 복수에 가깝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바를 쟁취한 자에게 한은 없다. 후회가 따를 뿐.
나이 들어갈수록 절실해지는 느낌과 생각이 문학은 넋두리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시발점으로 공인된 미술도, 청각예술인 음악도, 종합예술인 무용도, 그 형상화와 표현이 당당하다. 시각적 형태로, 소리로, 온몸으로 연출하고 호소한다. 화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말과 글을 통한 간접예술인 문학은 전혀 아니다.
말글의 노래라는 시도, 인생의 서사시라는 소설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왠지 슬프다. 소설은 더욱더 그렇다. 진실 솔직하다는 말로 치장하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태어나는 순간 노(老)·병(病)·사(死)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인간고라면, 오를수록 힘들고 무거워지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인생고 아니겠는가. 그 한과 고통을 넋두리로 푸는 것이 소설이라면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모독일까?
유명무명 소설가들의 문학적 편력이다. 소설을 배우는 시기, 패기만만한 도제시절의 것은 사실주의에서 자연주의를 거쳐 실존소설에 이르기까지 제법 도전적이다. 예술적 형식과 철학적 내용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완숙기의 소설들은 저마다 당신들의 고달프고 신산한 삶을 풀어내고 있다. 영락없이 넋두리다. 독자들의 독서편력 역시 작자와 흡사한 과정을 거치는 듯싶다.
백성들의 한과 아픔을 대신해주는 작품을 쓰고 싶다면, 그런 글을 위하여 작가로서의 나머지 인생을 걸어보고 싶다면, 발상부터 건방진가? 그래도 어쩌겠나, 주어진 업이 그것이라면. 그 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
이 글 마저 쓰고, 배산임수 누옥의 배산 격인 금정산으로 가려한다. 가서 안기려 한다. 온갖 것 다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앗아가는 자인 사람을 포근히 감싸주는 산 아닌가. 봄이면 되살아나는 흙과 생명수로, 여름이면 녹음방초로, 가을이면 풀잎 마르는 냄새로, 겨울이면 적설보다 포근하게 쌓인 낙엽으로.
그 산에 안겨 일개 백성인 나도 넋두리 할 것이다. 발가벗고 태어나 4등 없는 3등으로 끝난 적빈한 청춘을, 덧없이 보낸 세월과 늙고 병든 오늘을, 하루계획 세우기도 벅차서 자주자주 죽음을 생각하는 나날을, 그것이 인간의 숙명임을 속삭임으로 얘기할 것이다.
산은 지겨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끝날 때까지 침묵과 미소로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가르쳐 줄 것이다. 우주란 무한공간에서 지구는 점 하나고, 사람이란 보이지도 않은 티끌에 불과한 것을. 티끌끼리 가지고 가지지 못함을 따지고, 강약 여부를 비교하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이 얼마나 치졸하고 부질없는 짓인가를, 역시 침묵과 미소로 가르쳐 줄 것이다. 물의 근원인 산, 진짜 힘센 분이므로.
사족이다. 백성(百姓), 백 가지 성씨를 가진 보통사람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다. 요즈음 국적불명의 외국어와 일그러진 알파벳글자 등으로 우리말글을 이두시대로 되돌리고 있다. 자칭세칭 식자들이 앞장서서 그러니, 걱정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