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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부채를 펼치다 /이성희

시원한 바람 일고, 신령·철학·정·운치 간직한 부채처럼 정치도 청량했으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8-01 19:22:59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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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폭우를 동반했던 장마가 끝나자 지독한 폭염이 왔다. 서랍을 열고 낡은 부채를 꺼내서 펼쳐 본다. 몇 해의 먼지를 털어내니, 거기에는 예전 내가 잠시 배웠던 서예 선생이 쓴 '空山無人 水流花開' 8자가 아직도 완연하다. '빈산에 사람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의 명구이다.

거의 한평생을 귀양 다니고, 좌천을 겪으면서 천하를 주유했으니 아무리 천하의 풍류남아 소동파라 한들 어찌 가슴 속의 분노와 한 맺힘이 없으랴마는, 그는 또 이런 초탈한 시구를 남겼다. 그리하여 훗날 숱한 시인 묵객들에게 회자되어 그들 맺힌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가, 드디어는 21세기 이 무명 시인이 편 부채에도 바람을 품은 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부채를 부쳐보니 과연 먼지의 세속을 벗어난 청량한 계곡 바람이 이는 듯하다.

그러나 부채는 그저 바람만을 일으키는 도구는 아니다. 동아시아의 문화사에서 부채는 더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전설의 순임금이 오명선(五明扇)이라는 부채를 만들고, 대대로 무당들의 굿에서도 부채는 필수적인 무구였으니 필경 부채는 유서 깊은 신령함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 부채가 먼지를 날릴 수 있듯이 재앙을 몰고오는 액귀와 병귀를 쫓는다고 믿었기에 옛사람들은 단옷날 친한 사람들에게 부채를 선물하곤 했다 한다. 이 부채를 염병을 쫓는 부채라는 뜻으로 벽온선(瘟扇)이라 불렀다. 삼국시대의 제갈공명은 백우선(白羽扇)을 휘두르며 그 신출귀몰한 계략을 펼쳤으며, 판소리의 소리꾼에게 부채는 장강 같은 서사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유일한 무대 도구이다. 부채는 그저 단순한 도구가 아니어서, 소리광대에게 부채를 빼앗아버리면 문득 목이 턱 막혀서 한 소리도 내지를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쥘부채의 펴지고 접히는 구조가 여자의 정조에 비겨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기방 풍습에 마음을 주고 싶은 임이 생기면 기생은 자신의 화선(花扇)을 넌지시 임 앞에 밀어 놓았다고 한다. 부채로 표현되는 정이 은근하고 예쁘다.

부채에는 철학도 있다. 조선의 재야 철학자 화담 서경덕은 조정의 중신이었던 김안국이 선물로 보낸 부채에 감사하며 시 두 편을 지은 적이 있다. 이 두 편의 시에는 짧은 서문이 붙어 있는데, 이 서문이란 게 만만찮다. "묻건대 부채는 휘두르면 바람이 난다는데, 바람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하는 매우 평범한 듯한, 그러나 심오한 철학적 질문으로부터 서문은 시작된다. 화담은 이 질문으로부터 우주적 기의 운동에 대한 그의 도저한 기철학을 전개한다. 이어지는 그의 시는 철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성적 운치가 있어 더욱 좋다.

"한 자의 맑은 바람을 초당으로 보내 와/오동나무에 기대어 부치니 그 맛이 별나게 좋다./한 대에 머리끝이 모두 꿰어 있는 줄 뉘 알리오?/천 가닥 가지가 스스로 펼쳐지는구나./형체에 밀리어 기(氣)가 불리어 와/고요한 허공 아래 갑자기 시원하게 통하네."

무더운 한여름, 맑은 바람의 초당과 오동나무 푸른 그늘의 가난하면서도 여유로운 운치를 즐기는 고결한 선비의 여름날이 절로 떠오른다. 하나로 꿰여 있다가 천 가닥으로 펼쳐지는 것은 부채의 형상에 대한 묘사이지만 이것은 또한 온 세상이 쉼 없이 펼쳐지고 접히는 일기(一氣)의 율동이라는 우주관의 적절한 메타포다. 게다가 바람을 일으키니 더욱 그렇다. 기철학의 원조격인 장자 역시 "대개 이 대지가 뿜어내는 기를 바람이라고 한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라고 하지 않았던가.

날씨도 정치도 너무나 숨 막히게 갑갑하고 덥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하는 철 지난 옛 금지곡이 새삼 떠오른다. 부채를 펴 본다. 작은 부채처럼, 우리 손을 떠나 저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으면서도 천지의 이치와 기운을 불러와 이 폭염의 세상을 시원하게 통하게 하는, 그런 소박하고도 청량한 정치를 생각해 본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백성들 더위를 씻어 줘야 할 것이니/응당 시원한 바람을 온 나라에 퍼뜨려야 할 걸세." 화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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