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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게임종료 /박형섭

삶은 장기판 같은 것, 끊임없이 승패 반복…승부·승리 집착 말고 사라짐 받아들여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12-28 19:28:36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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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로 뜻하지 않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가 작심하고 쓴 희곡이 '게임종료'이다. 이 작품은 "끝났어, 끝나가고 있어, 아마 곧 끝날 거야"라는 클로브의 탄식에서 시작한다. 이 한마디보다 존재의 운명을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말 속에 사라짐의 절대적 명제가 들어 있다. 사라짐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은 사라짐의 물질적 진행이다. 그 무엇도 이 현실을 피해갈 수 없으니 잔혹하다. 중요한 것은 사라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어떻게 지혜롭게 끝내기를 할 것인가.

이 희곡에서 말하는 게임은 체스경기이지만 일반적으로 삶을 상징한다. 게임, 즉 삶이 끝나니 주변의 모든 것들, 사람도 동물도 빛도 사랑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극속의 인물들은 게임의 룰에 따라 나름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다한다. 살아가는 것. 주인공인 햄은 군림하는 권력자이다. 그는 세상이 온통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며 텅 빈 실내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앉은뱅이이다. 클로브는 햄의 먹고 자고 배설하는 행위 등 온갖 수발을 들어주는 시종이다. 그는 햄의 게임을 위해 그를 이동시켜주거나 창밖을 관찰한다. 햄에 대해 연민과 증오가 교차하지만, 언제든 그를 떠날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아니 실행하지 않는다. 네그와 넬은 햄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이 노부부는 각각 쓰레기통 속에 갇혀 있다. 때로 아들인 햄으로부터 생활에 짐이 된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끝내지 못하는 딜레마 속에서 무의미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권위와 품위와 능력을 상실한 꺼져가는 구세대의 모습이다. 그들은 아들의 자아도취적 행태를 비웃지만 생존을 위해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영어명은 엔드게임(endgame)이다. 서양장기에서 대세가 결정된 경기란 뜻이다. 클로브가 이미 선언한 바처럼 햄은 처음부터 게임에서 패배한 장기판의 왕인 셈이다. 그는 무능한 게이머가 그렇듯이 몇 번의 무의미한 수를 두어본다. 훌륭한 경기자라면 예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필연적인 파국을 연기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그는 클로브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장기판 위를 배회하는 장기의 말과 유사하다. 그의 독백, 그의 언어는 언제나 모호하다. 그것은 연극 전체를 불투명하고 부조리하게 만든다. 햄이 최후를 준비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끝인지 미래의 재도전을 내포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게임 중이라고 말한다. '게임종료'라는 제목도 역시 연극의 일부일 뿐 종료된 것이 아니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햄의 마지막 모습이 그가 처음 등장하던 장면의 모습과 닮은 것이 그 증좌다. 이 극은 악순환의 구조로 돼있다. 결국 우리는 이 게임과 유희가 끝없이 재현될 것임을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다. 극작가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존재의 상황을 제시하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제발 승부 혹은 승리에만 집착하지 말라고. 사랑도 우정도 인간관계도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위험한 줄타기를 그만하라고.

연극은 현실의 거울이다. 나는 '게임종료'를 읽으면서 불현듯 두 가지 영상이 떠올랐다. 하나는 지난 대선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 어른이 계시던 요양원의 풍경이다. 경기가 종료된 지금, 햄과 클로브를 닮은 주인공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동시에 판타지에나 있을 법한 '노인암살단'의 출현을 예고하는 세대 간의 참혹한 갈등이 머릿속을 스친다. 또한 삶이란 게임의 끝내기에 당도한 요양원의 치매노인들, 중환자실의 식물인간들의 신음소리가 귓전에서 울린다. 무한의 우주에 비하면 인생의 길이는 찰나에 불과하다. 인생은 주어진 시간동안 끝없이 승패가 반복되는 장기판과 다름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명료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탄생하는 순간부터 삶(게임)이 다할 때까지 우리 모두 전속력으로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사라지기 때문에 미련도 아쉬움도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임진년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는 석양의 노을처럼 여운의 빛을 남기고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부산대 교수 불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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