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첫발을 내디뎠다. 어제 박근혜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대국민 취임선서를 하고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국민들은 새 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팡파르에 환호하고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요란한 취임식도 내각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비서실마저 전 정권 사람들로 채운 채 시작한 '준비 안 된' 정권의 출현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건 아니지만, 새 정부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국민행복 시대'를 제대로 실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국민들의 염려와 의구심이 있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이 선거 당시 최대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내린 데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크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민들이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였던 경제민주화의 뜨거운 열망이 성장에 방점을 찍은 '창조경제'에 밀려난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국정비전을 수립한 대통령직 인수위는 경제민주화를 폐기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이 없다. 비록 용어로 쓰지는 않아도 국정과제 곳곳에 그 뜻이 반영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애매한 창조경제의 하위 개념으로 떨어뜨린 것은 이 정부가 경제민주화 의지를 거둬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아니면 애초부터 경제민주화가 득표를 위해 동원된 레토릭에 불과했거나.
새 정부를 이끌 일꾼들의 면면을 봐도 경제민주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유신2세'로 불리는 관료와 전문가 출신 일색인 내각으로는 개혁적 정책을 실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게 세평이다.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할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나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내정자는 둘 다 시장을 신봉하는 성장주의자들로 경제민주화를 견인해낼 인물들이 아니다. 특히 현 부총리 내정자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는 차기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복지확대를 꼽았고, 재벌을 개혁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경제민주화가 국정목표에 반영됐다는 강변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퇴색한 정황이 곳곳에 눈에 띈다. 당장 재벌 규제에 대한 정책이 완화됐다. 대기업 총수의 횡령 등에 대해선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으나 구형에 못 미치는 판결 시엔 항소하도록 약화시켰다.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중대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공약도 크게 후퇴했고 금산분리와 관련한 공약도 흐지부지됐다. 박근혜 후보 당선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김종인 전 새누리당국민행복추진위원장마저 인수위나 새 정부에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아는 인사는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것은 그가 치켜든 경제민주화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의 전도사인 김종인 위원장을 내세워 공약을 선점한 것이 결정적 승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지나친 시장과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이 우리 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민생을 파탄낸 데 대한 대안으로 국민들이 경제민주화를 선택한 것이다. 골목의 빵집까지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재벌들의 탐욕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성장을 해본들 그들의 배만 채우고 사회적 갈등만 증폭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한 학습효과이기도 하다.
왜곡된 경제질서를 상생과 공정으로 재편하려는 경제민주화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을 좋아할 국민들은 없다. 취임 직전 박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에서 나타난 지지율은 44%에 그쳐 역대 최저수치다. 밀봉인사와 불통, 경제민주화의 후퇴는 박근혜 정권의 첫걸음을 휘청거리게 만든 셈이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박 대통령의 좋은 이미지도 허물어졌다.
국민들의 지지 없이는 어떤 정권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은 정권 벽두부터 국민신뢰 회복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독선적 국정운영을 벗고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할 때 국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으로선 국민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떠받드는 공복 의식을 갖는 게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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