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아침, 그는 제3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초대장을 찢었다. 5·18유공자인 그에게 보훈처장 박승춘 이름으로 보내온 것이다. 지난 4년간 5·18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올해는 꼭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싶었다. 기념식 뒤엔 가족과 함께 5·18묘역도 둘러보려고 마음먹었다. 국민대통합을 내세운 박근혜정부에서는 뭔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새 정부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막았던 이명박 정부의 방침을 고수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그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홀대하고 폄훼하는 행위는 5·18에 대한 왜곡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나 마찬가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노래는 거룩한 역사현장과 치열한 시대정신을 담은 민주주의와 5·18의 상징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바쳐진 숱한 희생에 대한 경건한 추모다. 그것은 유신독재 시절 폭압적 통치 아래서 민주주의를 꿈꾸던 민중들의 처절한 바람이었고 신군부의 잔악한 총칼 아래 목숨을 걸고 맞섰던 뜨거운 저항과 따뜻한 연대의 순정한 결정체였다.
보훈청은 기념일 하루 전에 보도자료를 내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반대 이유로 5·18 공식 기념곡으로 제정된 바 없고, 민중의례에서 애국가를 대신하고, 정부기념식에서 주먹을 쥐고 흔들며 부르는 노래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댔다. 동서를 막론하고 민주주의 역사는 지배집단에 대해 개인의 자유와 인간존엄을 되찾기 위한 각성과 투쟁으로서 피의 기록을 남겼다. 당연히 그를 기리는 기념식에서 민주화 투쟁 중 스러진 희생에 대한 추념의 노래가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2003년 5·18이 정부기념식으로 승격된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행사에서 자연스럽게 제창됐던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세력의 끈질긴 역사 뒤집기 연장선상에서 5·18 역시 견제와 축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 민족혼으로 정립한 과거사에 대한 부정은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교과서에서 삭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축출하는 등 5·18정신의 폄훼에 나섰다. 특히 군장성 출신인 박승춘 처장 체제 이후 민주화운동과 5·18에 대한 보훈처의 시각은 불온하기까지 하다.
지난해에는 정체도 모를 우익단체가 만든 민주화운동 폄훼 DVD 영상물을 초·중학교 교재로 사용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섰던 민주화 세력을 북한에 동조하는 집단으로 왜곡한 내용이었다. 미래 세대들에게 건강한 국가관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할 보훈처가 시대착오적 색깔론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시도로 지탄 받았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의 공적을 선양해야 할 보훈처가 터무니없이 유공자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데 앞장 선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박 처장의 지나친 정치적 이념적 편향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잇따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보훈처가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 '나라사랑'에서도 박승춘 체제가 5·18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달 초에 발행해 배포한 '나라사랑' 5월호에는 5·18 관련기사는 단 한 꼭지도 찾아볼 수 없다. 명색이 5월에 5·18 기사가 전무하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예 5·18을 국가보훈 체계에서 찍어내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올 5·18기념식 역시 반쪽으로 끝났다. 기념식장은 절반 이상이 비었고, 정작 주인공인 5·18유족과 부상·구속자들은 망월동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대회'를 열었다. TV화면을 통해 갈가리 찢긴 5·18행사를 지켜보면서 그는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앞서서 나간 이들'에 대한 진혼의 노래가 빠진 5·18행사는 진정한 추모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확인해야만 했다. 보훈처의 독선과 억지는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이다. 그것은 저항과 대동, 평화의 5·18정신을 진열장 속에 가둬 박제화 시키려는 음모다. 그리고 국민통합을 훼방 놓는 저열한 꼼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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