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고리원전 직원들에게 원전 안전문화와 관련해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감사원이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부품이 원전에 대거 납품된 비리를 적발한 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원전의 고장과 은폐, 각종 납품비리, 품질보증서 위조, 소방담당 요원의 마약투약 등 온갖 비리가 꼬리를 물면서 국민들의 원전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평소 원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필자에게 원전 측이 강의를 요청해 온 것은 의외였지만, 원전안전과 국민들의 불신에 대한 그들 고민의 일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날 '원전의 안전은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우리 원전업계의 고질적 안전불감증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피해를 예측할 수 있고 피해범위가 한정적이고 복구 가능한 안전의 요건 중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원전의 현실을 지적했다. 원전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해선 안전신화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폐쇄적 조직문화를 극복하는 게 선결과제임을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잠잠하나 싶었던 원전 안전문제가 다시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불거졌다. 지난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원전의 제어기능을 하는 주요부품의 시험성적서가 조작된 사실을 밝혀냈다. 규격미달의 제어케이블이 신고리, 신월성 원전에 납품됐고 그로 인해 원전이 가동중단 사태에 돌입하면서 여름철 전력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급기야 정부는 원전부품 납품비리를 엄중한 사태로 규정하고 전면적 재수사에 돌입했다.

이번에 문제를 촉발한 시험성적서 위조 역시 원전산업의 폐쇄적 구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에 숱하게 봐왔던 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번 비리는 안전과 직결되는 핵심부품이 공식 인증기관에 의해 위조됐다. 그동안 전문성과 특수성을 내세워 성역을 구축해 왔던 '그들만의 비리 커넥션'이 다시 한 번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태의 장본인 JS전선은 해외 원전사업 입찰에 참여했다가 기술력 부족으로 탈락한 바 있어 제어케이블 제작 능력이 의문시된다. 그럼에도 국내 원전에는 수년째 납품하고 있으니 검증 절차가 있으나 마나다. JS전선의 청탁으로 시험성적서를 위조했던 새한티이피는 지난해 우수 검증기관으로 선정돼 교과부장관 상까지 받았다.

소위 '원전 마피아', 원전정책을 결정하는 당국과 학계, 업계가 장악한 우리 원전산업은 그 폐쇄성으로 해서 비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들만의 리그는 스스로 선수도 되고 심판도 되는 비이성적 구조를 고착화시켜 왔다. 원전부품 발주사나 제조업체 대표가 부품의 안전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기관의 관리감독까지 맡는 모순된 구조는 툭하면 보안을 내세우며 바깥과 차단한 채 거대한 이권사슬을 구축해 왔다. 당연히 스스로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검증과 감시 시스템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원전비리가 폭주할 당시, 국가권익위원회는 원전업계의 폐쇄적 리그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계약관행을 개탄했다. 권익위는 과도한 수의계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형식적 납품검사, 계약업체가 제출한 시험성적서에 의존하는 성능검사는 신뢰도가 낮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또 보안을 이유로 납품 과정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물론 원전업계가 그러한 지적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다.

새 정부가 이명박 정권의 원전 우선의 비호 아래 은폐되고 축소됐던 원전업계의 비리사슬을 끊겠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엄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원전업계의 폐쇄성을 혁파하지 않고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사로운 명분이나 이익에 급급하는 원전 마피아가 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원전안전은 백년하청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원전이 더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과 한순간 인간의 삶을 날려버릴 재앙의 씨앗이란 점을 확인한 바 있다. 원전비리를 척결하려는 정부의 강한 의지가 탈원전 정책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