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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흰 눈의 상상계 /이성희

차갑지만 온기 품은, 온갖 더러움 덮는 흰 눈 세상 그려보기…아주 사치는 아닐 터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02-12 19:34:22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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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겨울, 앙상한 나무 가지에 날을 세운 바람이 스치는 풍경은 스산하다. 연말연시의 설레는 불빛들도 사라진 이즘이면 도시의 거리도 근교의 전야도 모두 음울한 회색이다. 그러나 이러한 겨울의 스산함과 음울함을 일시에 눈부신 빛으로 변전시키고, 헐벗은 겨울 풍경을 풍요로움으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는 것이 눈이다.

눈은 온갖 형상과 색채와 더러움을 덮으면서 우리를 문득 아득한 시원의 지평으로 데려간다. 어린 시절 아침 창문을 열다가 밤 사이 감쪽같이 흰 눈에 덮인 설원의 세상을 발견할 때 우리를 사로잡던 그 경이로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대목인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를 읽었을 때 그 흰색의 전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눈이 드문 곳, 그러나 요 며칠 눈비가 섞여 내리는 남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겨울 이 헐벗은 풍요로움, 눈의 상상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우리는 왜 눈의 흰색에 그토록 매혹당하는 것일까? 작가 김주영은 그의 서정시 같은 소설 '홍어'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눈은 어떻게 해서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허함과 팽만함이, 그리고 소멸과 풍요함이 부담 없이 서로 오묘하게 어우러져 조화의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눈의 마법 같은 이러한 모순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눈 설(雪)' 자의 옛 모양은 불확실하지만, 일본 학자 시라카와는 '비 우(雨)' 자 밑에 날개의 상형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고 보니 눈은 날개를 단 비이다. 이곳에 내리는 눈도 조금씩 굵어지면서 가볍게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실제로 '雪' 자의 뜻에는 '흰 새'의 의미도 있다. 황동규 시인은 '성긴 눈 날린다/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몇 송이 눈'이라고 읊고 있다. 눈은 하강의 중력과 가벼운 비행이라는 모순을 조용히 품고 우리의 상상계에 내린다. 쉼 없이 떨어져 내리지만 우리도 가끔은 어디론가 하염없이 방황하며 날고 싶다.

눈은 차가우면서 따뜻하다. 눈은 차가운 겨울의 물이지만 얼음과는 다르다. 눈은 차가움 속에 온기를 품고 있다. 러시아의 시인 예세닌은 '첫눈 위를 서성이면/마음은 타오르는 불길의 은방울꽃'이라고 하였다. 은방울꽃 같은 흰빛의 은은한 불길이 눈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그 추운 겨울밤에도 눈이 내리면 따뜻한 온기가 우리의 마을과 마음을 덮는다. '눈 오는 밤에'라는 시에서 김용호 시인이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어느 집 질화로에는 알밤이 토실토실 익겠다'라고 하며 눈 오는 밤 따뜻한 질화로를 연상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 눈의 온기는 그 하강을 처연하지 않고 가볍고 편하게 한다. '석명(釋名)'이라는 옛 책에는 눈을 '물이 내리면서 찬 기운을 만나 응고하여 수수연(綏綏然)하다'라 풀이하고 있다. '수수연'이란 편안한 모습을 말한다.

솜을 닮은 눈은 온갖 거리와 지붕과 들판을 덮는다. 그리고 흰색으로 모든 색채를 덮는다. 그 흰색은 이 세상 표면의 현란한 무늬들을 덮으면서 오히려 사물의 본바탕을 문득 우리 앞에 여는 것은 아닐까. 흰색은 모든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바탕이다. 그것은 소멸과 공허이면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풍요로움을 내장하고 있다. 여기에 또한 우리 동양의 내밀한 미학이 있다.

공자는 '논어' 팔일편에서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흴 소(素)' 자는 일체의 가공이 가해지지 않은 피륙의 흰 바탕을 말한다. 공자는 아마 그 흰 바탕으로 우리들 본연의 도덕성을 비유하고자 했던 것 같다. 본연의 도덕성이 모든 문화적 작위, 가령 예(禮)의 전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이 '회사후소'는 공자의 생각을 넘어서 동양 화론의 주요한 격률이 된다. 서양회화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형상보다 그 형상의 배경, 무한한 형상의 바탕인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회화의 심미관은 그 뿌리가 여기에 닿아 있다. 눈은 형상을 지우며 어느새 잊었던 세상의 그 흰 바탕을 발견하게 한다. 엄혹한 세상의 겨울, 가끔 흰 눈의 세상을 그려보는 것이 아주 사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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