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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페스트, 천연두, 에이즈, 에볼라… /박무성

전염병이 무서운 건 공포감 확산 따른 가치관·신념체계 붕괴

준전시 상태의 방역, 도덕·인권도 지켜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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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으로 불렸던 아즈텍왕국의 몰락은 흔히 아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21년 코르테스가 채 600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사를 이끌고 총과 대포를 앞세워 500만 인구의 왕국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코르테스의 군마나 화력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아즈텍인들은 전쟁 초반 한때 코르테스와 그 부하들을 잉카에서 몰아냈다. 그런데 갑자기 괴질이 창궐했다. 스페인군이 옮긴 천연두는 몇 달 새 아즈텍왕국을 휩쓸었다. 살아남은 주민이 10%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분석이다. 결국 스페인군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세균전'으로 아즈텍 왕국을 무너뜨린 셈이다.

세균학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는 곧 전염병과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구상에서 천연두를 사실상 퇴치했다고 천명한 건 1976년이었다. 현대의학이 마침내 병원체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전염병이 더는 인간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교만도 내비쳤다. 그러나 불과 4년 뒤 에이즈(AIDS)가 출현했다. 지금까지 2300만 명 넘게 숨졌다. 해마다 200만~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이즈가 주춤해질 즈음 사스(SARS·중증급성호흡증후군)가 등장했다. 2002년 11월 사스 발병 이후 이듬해 7월까지 8000여 명이 감염돼 774명이 사망했다. 2003년에는 조류인플엔자(AI), 또 2009년엔 신종인플루엔자가 나타났다.

급기야 올해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 바이러스는 독일 미생물학자 마르부르크 박사가 1967년 콩고 '에볼라강' 주변에서 발견했다. 현대의학은 에볼라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도 없다. 지난 3월부터 현재까지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1700여 명이 감염돼 96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치사율이 최대 90%나 되지만, 에볼라는 설사 발병한다고 해도 한 부족에 타격을 입힌 뒤 잦아들곤 해 마치 풍토병처럼 간주됐다. 이런 바이러스가 갑자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이유는, 매우 역설적이다.

아프리카 주민들은 '버스'를 주범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버스 보급으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롭게 확대되면서 바이러스 또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정체도 모르는 치명적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근원적 수단이 문명의 이기와 그 혜택으로 인한 것이다. 특히 교통수단의 발달은 인간에게 공간이동의 편리를 제공하는 부작용으로 모든 질병의 균질화를 초래했다. 1980, 90년대 에이즈의 세계적 확산 역시 보편화된 항공여행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요즘 지구촌 항공기 탑승객은 연간 30억 명이 넘는다. 전 세계 600여 곳에 산재한 국제공항에서 에볼라 감염자를 봉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WHO가 에볼라를 '지난 40년간 최악의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로 선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전염병이 갖는 치사율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이 공포는 일시적 패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치관과 신념체계의 붕괴, 공동체 해체, 나아가 정신적·문화적 황폐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코르테스의 스페인군을 몰아낸 뒤 넉 달간 유행한 천연두는 아즈텍인들로선 신이 내리는 무자비한 징벌이었다. 천연두를 처음 접한 그들은 신에게 비는 일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면역력을 보유한 스페인군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데, 자신들만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아즈텍인들은 영혼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스페인이 숭배하는 신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14세기 유럽은 페스트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심리적·경제적·문화적 침체, 그야말로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페스트가 빈발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일상의 통념이나 관습조차 무너지기 일쑤였다. 자신에 가득 찬 세계관은 사라졌다. 합리주의 신학과 전통적 의식에 대한 믿음이 처참하게 붕괴됐다. 이렇듯 바이러스는 인간 생명뿐 아니라 사회유기체에도 치명상을 입혀왔다.

현대 국가는 나름대로 방역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큰 범주에서 재난대응시스템이다. 나이지리아 등 일부 아프리카 국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준전시상태로 들어갔다. 환자 격리나 이동 통제는 기본이고 국경 폐쇄, 감염지역 고립화 같은 초법적 조치도 강압적으로 시행될 것이다. 도덕이나 인권 따위는 전시상황보다 더 가볍게 내팽개쳐질 공산이 크다. 각국 정부가 국가의 도덕성과 함께 에볼라 바이러스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어떻게 지켜내고, 불안감을 얼마나 차단해 줄 수 있는지 또다시 시험대에 올라 있다. 고도위험사회인 한국도 물론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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