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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대기자라는 직분 /박창희

이병주 이형기 등 본지 거쳐간 논객들…기자정신·시정신 융합

'미디어에 울음 없다' 노시인의 질타 새길때

  • 대기자 chpark@kookje.co.kr
  •  |   입력 : 2015-04-12 19:22:24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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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이 났다. 대기자(大記者)-. 자격지심과 부끄러움, 부담감이 한덩어리가 되어 어깨에 얹혀왔다. 과분지망(過分之望), 즉 분수에 넘쳐 있는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대기자가 뭔가. 사전에는 '특정 분야에 뛰어난 전문가로서의 기자'라고 나온다. 경륜깨나 있는 기자에게 붙이는 예우 차원의 직함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언론계의 사치인지도 모른다. 기자면 기자지 대기자는 무슨! 여담이지만 소식을 듣고 한 지인은 "어쩌다 대기자(待機者)가 되었소"라며 되레 위안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허허, 그냥 웃어야 했다.

선임기자·전문기자·대기자같은 제도는 언론 환경과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사회가 다층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언론의 전문성과 탐사성이 요구되고, 독자의 눈높이에 부응하는 전문적이고 융합·통찰적인 보도·논평이 필요해진 터다. 변화에 따른 쇄신, 자체 혁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됐다. 서방의 유력지들은 물론 서울의 중앙지들이 대기자 제도를 도입해 특색 있는 지면을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신문으로선 처음으로 문을 여는 사례라 중압감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의 족적이 밟힌다. 한국소설의 금자탑을 세운 나림 이병주 선생과 영혼을 울리는 시편을 남겼던 이형기 선생은 본지의 편집국장을 지낸 분들이다. 한국 동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최계락 선생은 이곳 문화부장이셨다. 1970년대 이후에도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 김규태(시인), 최화수(소설가), 조해훈(시인), 강동수(소설가) 등 한국 언론계를 호령하고 문단에서 필봉을 날린 이들이 적지 않다. 이분들은 대기자란 직함만 없었지 사실상 대기자들이었다.

이형기 선생의 시를 살펴보면 기자정신 같은 게 번뜩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남긴 '낙화'라는 시는 아름답다 못해 눈물겹다. 그는 시인 이전에 20여 년간 언론계에서 뼈가 굵은 기자였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2005년 별세하기까지 그는 투병 와중에도 한시도 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술 자시고 흥이 돋으면 '꽃 잡고 길을 물어~'라는 유행가 대목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절친인 박재삼 시인을 그렸다는 대목에선 따스한 인간애가 느껴진다. 그에 대한 후일담은 대저 글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고, 어떤 쓰임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워싱턴포스트(WP)의 밥 우드워드가 유명한 건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보도와 함께 이후 집요하게 써온 탐사기사 때문이다. 뉴욕타임즈(NYT)의 해리슨 솔즈베리 대기자는 국제문제 분석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일본만 하더라도 백발이 성성한 채 현장을 누비는 대기자가 많다. 국내에는 중앙일보의 김영희·박보균, 동아일보 심규선, 한겨레의 곽병찬 대기자 같은 이들이 언론의 새 길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길은 열었으되 그 길이 험난함은 한국언론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식민 시대부터 독재정권 시대까지 기자 한 명 한 명의 필봉에는 지사적 풍토가 깃들어 있었다. 신문이 미디어라는 옷을 입고 매체환경이 변하면서 그러한 풍토는 옛 이야기가 됐다. 기자들은 파편화·개체화됐고 언론은 기능화됐다. 2014년 언론연감에 따르면 국내 기자직 종사자는 2만7398명으로 전년대비 7.2% 증가했다. 이렇게 기자가 많았던 시절은 없었다. 그럼에도 뉴스의 질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기사작성 메커니즘이 광고·트래픽 논리로 획일화되면서 오히려 쓸모없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현장에 기자가 없다는 말도 들린다. 기자들이 조로증에 걸려 어느 정도 연륜만 쌓이면 데스크로 앉거나 논설위원이 되어 늙어버리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신문이 위기라 하고, 기자에게 '기레기'라는 오명까지 덧씌워진 시대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다. 이런 와중에 국회의원들은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에 기자를 슬쩍 포함시켰다. 자존심의 상처를 거론한 기자들이 많았지만, 따져보면 이것도 언론이 자초한 일이다. 프랑스 비시 정권 하에서 나치에 부역했던 언론인들이 처벌받았던 상황이 겹쳐진다.

1933년에 태어나 식민시기, 경제개발기, 군사정권기, 민주화 이행기까지 두루 봐 온 고은 시인은 "오늘날 미디어에는 울음이 없다"고 일침을 놓은 적이 있다. 차가운 공간에서 취재하고 차가운 액면과 언어로 기사를 쓰면서 현장의 뜨거움과 땀방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고은 시인은 '최고의 기사는 바로 시'라고까지 했는데, 이 대목은 이형기 선생의 기자정신, 거기서 발원한 시정신과도 통한다.

대기자라는 직분을 새삼스럽게 들춰본 것은 기자, 글 쓰는 자의 책무와 본분을 새롭게 되새겨 경계하려 함이다. 대기자는 이를테면 글쓰는 자의 책무가 '크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필경 모든 기자가 그러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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