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으로 무장한 그 성채(城砦)는 난공불락이다. 돌 정도를 던져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성채에 작은 균열이라도 보이면 신속히 결집해 대응 전선을 형성한다. 권력과 자본, 지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핵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핵 존엄성을 옹호한다. 성 밖 사람들이 불안하다, 아프다, 죽는다 아우성을 쳐도, 핵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왼다.
국내 핵발전소가 원전 마피아들에 포위됐다는 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이후에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원전 마피아들은 끄떡없이 자신들의 성채를 지키고 있다. 철옹성이다. 월성 원전 1호기의 수명을 다시 10년 연장하고, 말썽 덩어리인 고리 원전 1호기의 수명을 10년 더 재재연장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주민 불안, 지역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크랙이랄까, 그들의 거대 성채에 균열이 드러난 건 지난해 10월이다. 부산지법 동부지원이 고리 원전 주변에 살면서 감상선암을 앓고 있는 주민(여· 48)이 한수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원전과 갑상선암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환경오염 피해소송의 '개연성 이론'을 적용했다. 대기·수질·방사능 오염과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지역주민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그 피해가 주변의 오염물질에 의한 것이라는 개연성만으로도 가해자는 배상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한수원은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거꾸로 증명해야 한다.
이 판결을 끌어낸 사람은 장애인 권리회복 운동을 벌여온 '균도 아빠' 이진섭(51) 씨다. 발달장애인 균도(23) 씨와 함께 전국 3000㎞를 걸었다는 투사 아빠다. 이 씨는 자신과 아내의 암, 아들의 발달장애가 원전 방사선의 영향이 아니냐며 한수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부산녹색당 등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갑상선암에 대한 역사적 판결이 날 당시 법정에는 이 씨와 균도 씨 둘뿐이었다고 한다. 균도아빠의 투쟁은 그만큼 외롭고 처절했다.
판결의 파문은 매우 컸다. 환경운동연합 주도의 소송단이 꾸려지자 원전 주변 지역의 갑상선암 피해자들이 너도 나도 모여들어 한수원을 상대로 집단 소송에 나섰다. 피해자는 고리 원전이 202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주 월성 40명, 전남 영광 32명, 경북 울진 11명 등 모두 285명이었다. 이들은 원전 반경 10㎞ 이내에서 최소 5년 이상 살거나 일하다 갑상선암에 걸린 주민이다.
원전에서 상시 배출되는 삼중수소의 인체 유해 여부도 뜨거운 관심사다. 원전 가까이 사는 주민일수록 소변에서 더 많은 양의 삼중수소가 검출된다는 건 인과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삼중수소는 논점이 되지 않았다. 얼마 전엔 원전에서 암 발생의 원인이 되는 방사성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등 10여 종의 방사성 핵종이 방출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주민들이 불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을 법한데도 모르니까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일격을 당한 한수원은 1심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한 상태다. 법원의 2, 3심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판결 후 터져나온 집단소송은 원전의 성채를 뒤흔드는 지진파가 됐다. 핵심 쟁점은 원전이 갑상선암을 유발한 원인인가 하는 '인과관계' 여부다. 핵발전소에서 평상시에 액체, 기체 형태의 방사성폐기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한수원이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해온 사항이므로 한수원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것도 그들은 잘 안다.
예상했지만, 한수원에 우호적인 원전 마피아들은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법원 판결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한국원자력학회와 대한방사선방어학회 주최로 지난 6일 제주에서 열린 '원전 주변 주민과 갑상선암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주제로 한 워크숍은 제기된 쟁점들을 사실상 정리하는 자리였다. 워크숍에 참가한 의학자들은 "원전 주변 지역의 갑상선암 발견 건수가 통계적으로 높지만, 원전의 방사선 피폭 때문이라고 볼 과학적 근거는 없다"는 식의 주장을 앞다퉈 늘어놨다. 누가 봐도 한수원 측의 입장을 옹호·지원하는 워크숍이었다. 이는 2심 판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전선은 선명해졌다. 원전 마피아들은 그들의 성채에 균열이 나려하자 조직적으로 방어선을 치고 있다. 반면 시민세력은 이렇다할 연대없이 각개전투 양상이다. 이대로 가면 싸움 결과는 보나 마나다. 시민세력은 원전 비리와 도덕적 해이, 관리 부실, 전망 부재 등 갖가지 '원전 잔혹사'를 손에 쥐고도 번번이 성채 앞에서 좌절했다. 법원이 내린 전향적 판결을 지키려면, 생태적 양심과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시민 의병이 나타나야 한다. 이 운명적 대치를 넘어서야 저들의 성채에 갇힌 원전을 끌어내 불안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