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른 떠난 자리의 공허가 크다. 달 그림자가 표표히 허공에 흩어진다. 황망히 떠나보낸 임처럼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허전하다.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던 한 시인의 말은 맞다. 가신 이가 남은 이들을 위로한다.
솔뫼 최해군. 1926~2015. 우리 나이로 아흔. 그래도 오래 사셨다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해놓은 일과 해야 할 일, 풀어놓아야 할 이야기가 그만큼 많았음이다. 그의 생몰연도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부산의 지역사를 관류한다. 단순히 조류에 휩쓸리듯 흐른 게 아니라 노잡이로서, 개척자로서 흐름을 꿰뚫어냈다. 그가 한평생을 던져 일군 지역학의 텃밭에는 지금 '부산학'이 자라고 있다. 선생이 쓴 '부산포'(3권, 1985~87년), '부산의 맥'(2권, 1990년), '부산항'(1992년) 등 부산사 3부작은 누구도 접근 못한 부산에 대한 실체적 기록이다. 그는 올곧은 교육자였고 속 깊은 작가였으며 행동하는 향토사학자이자 시민운동가였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넘치거나 눈총받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선생은 천생 휴머니스트였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그랬다. 유유자적해 보이셨고 후덕한 표정 뒤엔 천진난만함을 감추고 있었다. 3년 전쯤이다. 그를 인터뷰하면서 뜻하지 않게 선생의 아픈 가족사 일단을 들추게 되었다. 선생은 "인생이 그런 거여. 나이 들면 외로워지고 아프면 서럽고….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바다가 되는 거여"라며 신선처럼 웃으셨다.
선생은 1990년 초부터 부산 연제구 거제현대아파트에서 부인 김기분(1928년 생) 씨와 함께 살았다. 부인은 15년 전부터 인지장애, 즉 치매를 앓았다. 게다가 선생의 막내딸(60)마저 오랜 병치레를 겪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막내딸은 50대에 이르러 뇌졸중까지 겹쳐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아파트에 시간제 파출부가 출입했다지만, 부인의 수발과 딸 간호는 선생의 몫이었다. 선생은 어떤 모임에서도 이런 사정을 드러내거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고해(苦海)를 혼자서 걸어갔다.
그 부인이 지난해 12월 말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선생도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양산의 요양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도 선생은 펜을 놓지 않았다. 흐려지는 시력을 다잡고 손아귀의 힘을 모아 한 땀 한 땀 글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써놓은 일기와 단상 등을 모아 도서출판 해성에서 책으로 펴내기로 한 터였다. 선생이 꼭 넣어달라며 출판사에 편지로 보낸 육필 원고 중에 '그대 간 지 한 달'이란 시가 있었다.
'그대 간 지 한 달/ 이 방 저 방을 비워두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건가/ 비워진 방에는 찬바람만 채워지고 있네.…/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네./ 이 비로 그대 무덤의 잔디는 뿌리를 내릴 것이고/ 새싹도 돋아날 것이네./ 이내도 쉬이 이 자리 뜨야 할 것이고/ 그대 곁으로 갈 것이네./ 기다려 다오. 그대와 이내의 그날들,/ 그날들을 그리며 기다려 다오.'(2015. 1. 30.)
절절한 '사부곡(思婦曲)'이다. 68년간을 해로하고 훌쩍 떠나버린 부인이 야속했던가. 오랫동안 병수발시키며 괴롭힌 부인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한 건 삶의 초연인가 그리움인가. 휴머니즘이 인간에 대한 애틋함의 표출,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할때 선생은 그 고갱이에 다가가 있다. 선생은 아픈 막내딸이 신나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부인과 함께 볼 수 있기를 꿈꾸었고, 그 꿈이 현실이 되길 소망했다. 그게 꿈으로 나타나 부인을 깨울라치면 부인은 곁에 없었다.
선생의 내면에 감춰진 가족애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6일 장례식 하관 때 후배 작가가 선생이 쓴 위의 '사부곡'을 낭송했다니 가슴이 더욱 짠하다.
선생은 마지막까지 작가였다. 그런 선생을 지역 문단에서 '문인장'으로 챙긴 것은 기꺼운 결정이다. 평소 드리운 그늘이 크고 넓었던 만큼 조문객이 많았고, 선생에 대한 후일담도 많이 오갔다고 한다. 장례다운 장례가 치러진 셈이다. 다만, 중앙 언론들이 선생의 부음을 아예 무시하거나 극히 가볍게 다룬 것은 지적해둘 부분이다. 잘 해봐야 지역작가라서 그런가.
부산작가회의가 내는 계간 '작가와 사회' 2014년 여름호에는 최해군 선생이 기고한 자전 산문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글은 인간 존재를 찾는 일이다…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야 한다지만 진실한 작품은 생산된 원천(지역)에서 우러나야 곰삭을 수 있다." 지역문학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원로 작가의 충고다. 진실한 지역문학으로 중앙과 승부하라는 주문이다.
요산 김정한과 향파 이주홍의 뒤를 잇는 부산지역 현대문학 2세대를 대표한 큰 작가가 떠나갔다. 최해군 선생이 펼쳐놓은 부산학의 후속 작업과 함께 진실한 지역문학을 누가 어떻게 꽃피울지,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시작돼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