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일행이 적진인 울산 서생포 왜성을 찾아간 건 1594년(선조 27년) 봄이다.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강화 회담을 위해서였다. 명나라 구원군이 들어와 있었지만 기요마사는 기세등등했다.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포 왜성의 ㄷ자형 출입구는 '호구'(虎口·호랑이 입)라 불리고 있었다.
서생포 왜성의 심장부에 시퍼런 눈빛의 두 사내가 마주앉았다. 기요마사가 물었다. "조선의 최고 보물이 무엇이요." 사명대사가 짧게 답했다. "그건 일본에 있을 것이오." "그게 뭐냔 말이오." "그건 바로 기요마사 당신의 목이요!" 깜짝 놀란 기요마사는 '껄껄~'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사명대사가 어떻게 적진을 파고들었는지는 '송운(사명)대사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숨막히는 기록의 일단을 따라가보자.
4월 12일, 사명대사는 경상좌병사 소속의 군관 이겸수의 길 안내로 통역관 김언복과 승려 등 20여 명과 함께 경주의 임시 진을 나섰다. 사명대사 일행은 무참히 격퇴당한 울산 병영성을 넘겨보며 태화강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윽고 13일 아침, 일행은 태화강 삼산진(三山津)을 건너 회야강변 공수곶원(온양)에서 말에게 물을 먹인 뒤 서생포로 향했다. 서생포 동쪽 들(남창들)에 이르자 일하던 왜병 수천 명이 길에 가득 차 칼을 휘둘러 보이거나 조총을 쏘면서 위력 시위를 했다. 얼마 후 기요마사의 부장 미노베 기하치로가 안장을 갖춘 말 4필을 가져와 옮겨 타게 하고, 수십 명의 왜병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여 왜성으로 안내했다.
기요마사는 강화 조건으로 5개 항을 제시했다. 조선의 4개 도를 할양할 것, 교린을 지속할 것,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에 시집 보낼 것, 조선의 왕자 및 신하를 인질로 내줄 것. 사명대사는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의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며 이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다"며 일본 측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강화 회담은 이후 3차례 더 열렸고 두 사람은 모두 세 번을 만났다. 회담이 모두 결렬되긴 했으나 조선 측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적정을 살피고 군세를 파악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명나라 간에 진행되던 강화교섭의 주도권을 우리가 쥘 수 있게 되었다. 숨가쁜 담판이 있은 지 420년이 지난 지금, 서생포 왜성은 묘한 소란에 휩싸여 있다. 언제부턴가 일본인 학자들과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인기 답사지로 떠올랐다. 한국의 문화관광해설사들은 왜성의 독특한 구조를 설명하거나 사명대사의 담판 스토리를 들려주고, 기요마사와 조선의 악연 또는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한다. 기요마사는 퇴각하면서 조선의 도공과 석공 등 고급 기술자들을 대거 일본으로 끌고 갔다. 규슈 구마모토의 울산마치(蔚山町)는 그가 끌고 간 울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다. 이를 계기로 2010년 4월 울산과 구마모토는 우호협력도시가 되었다. 기요마사가 끌고 간 조선인 김환(金宦)은 토목 건축 재정 등 다방면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구마모토의 별이 된 인물이다. 1611년 기요마사가 죽자 그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기요마사를 기리는 혼묘지(本妙寺) 한쪽에는 '조선인김환묘(朝鮮人金宦墓)'라 적힌 비석이 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여대남(余大男)은 13세에 끌려가 일본에서 쇼닌(上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혼묘지의 3대 주지가 되었다. 일본에서 산 지 27년이 지난 1620년, 조선통신사 편에 건네진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통한의 답장을 했으나 그의 귀향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기요마사는 서생포 왜성의 축성 경험을 살려 일본 3대 성 가운데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기요마사는 잔인한 침략자가 아니라 '축성의 달인'으로 둔갑한다. 목숨 걸고 적진에 들어가 의연하게 담판을 벌인 사명대사가 아신다면 크게 꾸짖을 일이다.
왜성은 임진왜란의 뼈아픈 흔적이면서 오늘의 일본을 읽는 전망대다. 왜성의 견고한 구조와 쓰임새는 아직도 학계의 연구대상이다. 본성과 외성, 소곽과 중심곽, 몇 겹의 지환(之丸) 등 성벽으로 둘러쳐진 네모진 공간들은 굴절되고, 엇물리고, 위장된 길로 난공불락을 완성한다. 이런 왜성이 동·남해안에 30여 개나 있다. 견고한 왜성의 성돌에 일본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일본인들이 '그들 조상'의 흔적을 찾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왜성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정리되지 않은 건 문제다. '왜(倭)' 자가 들어 있다고 무시 또는 방치할 텐가. 어두운 역사를 반추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왜성은 의미 있는 역사 콘텐츠다. 부산-후쿠오카 역사탐방단을 꾸려 교차 답사를 해보면 어떨까. 전란 중 담판이 벌어졌던 서생포 왜성에서 한중일 평화포럼을 연다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왜성을 무겁게, 무섭게 다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