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소재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의 복원 공사 현장에서 귀중한 자료들이 발견됐다. 110~120년 전 대한제국의 외교사절들이 미국 땅에서 예상외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발견된 자료는 모두 15점. 엽서와 명함, 전시회 및 결혼식 초청장, 크리스마스·신년 카드, 성경학교 초대장 등이다. 공사관 건물 2층 벽난로 해체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자료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당시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공사관에 보낸 결혼식 초청장이다. 앨리스는 1906년 2월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짜를 고려하면 초청장은 1905년 연말이나 1906년 연초에 공사관으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시점이 묘하다.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이 1905년 11월 17일이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 주미 공사관도 일제로 넘어갔다. 그 어수선한 시기에 조선 공사와 직원들은 결혼식 초청장을 받았을 것이다. 외교 주권을 빼앗기고 처량하게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에서 결혼식 초청장을 받아든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종 황제는 미국을 의지했다. 아관파천의 러시아마저 일본에 의해 쫓겨가자 기댈 곳이라고는 '영토 욕심이 없는 양대인(洋大人)' 미국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9월 앨리스가 배편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미국 외교사절단의 일환으로 일본 필리핀 중국을 거쳐 도착한 것이다.
고종의 환대는 극진했다. 지켜보는 이들이 애처로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앨리스와 사절단을 위해 황실 가마와 정부 가마가 총동원됐고, 한양의 가가호호에 낯선 미국기가 내걸렸다. 고종은 '앨리스 공주'를 통해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헛수고였다. 앨리스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교사절단의 일행인 태프트 미 육군성 장관은 일본 방문 때 일본 수상 가쓰라와 밀약을 맺었다. 일본과 미국이 대한제국과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한다는 내용. 루스벨트 대통령은 외교사절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딸 앨리스를 합류시켰다고 한다. 그런 대통령의 딸에게 태프트가 대한제국 방문을 앞두고 밀약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앨리스의 결혼식 초청장에 약소국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낙담한 얼굴이 오버랩된다.
문화재청은 공사관 복원 공사를 마무리한뒤 내년 상반기에 박물관 형태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대한제국의 흔적들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좋겠다.
김찬석 수석논설위원 chans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