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배우자와도,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다. 청말 서태후는 친아들 동치제를 화류계로 유인해 몹쓸 병에 걸려 죽도록 방치했다. 아들이 아니라 권력 라이벌로 본 것이다. 전두환은 7년 동안이나 대통령 자리에 있고도 아쉬움이 남아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희한한 기구를 만들어 상왕 노릇을 하려고 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만만히 봤겠지만 천만의 말씀. 같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절대 권력을 생전에 넘겨줄 리 만무하다. 물론 드물지만 예외도 있다. 자신이 죽은 뒤 왕위 투쟁으로 골육상쟁이 벌어지고 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할 때이다. 형식적으로 왕위는 물려주되 상왕으로 여전히 국정을 좌우한다.
조선 태종은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지 2개월 만에 기습적으로 양위했다. 조정 신료들이 셋째의 책봉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시시비비를 걸 겨를도 없었다. 대신 태종은 4년 동안 상왕으로 군림했다. 조선 초기 혼란기에 군권을 틀어쥐고 국정에 개입해 세종 집권의 초석을 다졌다. 세종의 성세는 아버지 태종의 조기 퇴위와 수렴청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올해 82세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밝혔다. 일본 정부는 일왕의 조기 퇴위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특별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후계자인 장남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56세이니 조기 퇴위가 거론되는 것이 낯설지는 않다. 예전 왕조시대라면 즉위한 뒤 사망하고도 남을 나이에 왕위 계승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일왕의 생전 퇴위는 이웃 국가의 구경거리로 치부하기 어렵다. 아키히토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히로히토, 다이쇼, 메이지 일왕 가계는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장본인들이다. 조선왕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일본왕조는 여전히 만세일계 운운하며 천수를 누린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된 지 2년 후인 1912년 5월. 고종의 거처인 덕수궁에서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1912~1989)가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덕혜옹주는 고종 승하 후 1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난다. 열다섯 살 많은 이복오빠 영친왕이 갔던 길 그대로다. 그 이후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은 최근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키히토의 조기 퇴위 소식을 접하며 조선왕조와 덕혜옹주를 떠올린다.
김찬석 수석논설위원 chansk@kookje.co.kr